안팎에서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뜨겁다. 보수주의(conservatism)와 진보주의(liberalism)라고 표현되는 이 뿌리깊은 이념적 대립은 또 수구와 개혁, 우파와 좌파, 그리고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대립으로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neo-con)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장기전이 될 것으로 예상되던 이라크전을 한 달만에 승리로 이끈 뒷면에는 미국식 정의와 가치관을 추구함에 있어 거칠 것이 없다는 새롭고도 강력한 보수주의 이념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주목을 끌고 있는 위클리 스탠더드라는 시사저널이 대변하고 있는 이 신보수주의는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미국의 안보와 외교의 흐름에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유력한 인사들을 포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보수주의의 새로운 약진에 대해서 진보진영은 심각한 우려와 저항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보수-진보 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정당, 언론, 싱크탱크, 로비스트, 학자, 칼럼니스트, 평론가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성향이 구분되어 왔다. 이들은 낙태, 사형제도, 동성결혼에서부터 의료보험, 사회보장, 테러, 전쟁, 대외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이슈에 관해서 대립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적 구분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미국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시민의식이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보수-진보의 대립, 갈등은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몇 개월 사이 한국에서는 정규대학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이른바 개혁주의적 ‘참여정부’라는 간판을 달고 과거와 사뭇 다른 통치행위를 보이고 있다. 영화감독 출신 장관이 ‘새로운’ 언론관을 피력하면서 물의를 빚기도 하고, 국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북 성향의 인사들이 국가안보기구의 요직에 임명되고, 또 새로 당선된 어떤 의원은 캐주얼 복장으로 국회 단상에 오르다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게 달라진 새로운 모습들을 놓고 한국서는 보수의 퇴조, 진보의 득세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진보와 보수간의 이념적 구분이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정치인이나 학자들도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에 관해서 구체적이고 진지한 주의를 기울여 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위에 적은 것처럼 예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이상한, 다른” 행태들이 등장할 때 이를 진보라고 치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동안 ‘다르다(different)=틀리다(wrong)’라는 이상한 등식이 지배해 오던 한국사회였는데 이제 그 틀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다른 것들의 등장을 용인하게 되자 갑자기 무엇이든지 다르면 진보라고 여기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남을 무시하고 자신의 기득권만을 끝까지 부둥켜안는 것이 올바른 보수가 아닌 것처럼 무조건 옛 것과 다르다고 해서 올바른 진보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일진대 새롭다고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자칫 게걸음이 될 수도 있고 파행이 될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보수는 ‘지킴’을, 진보는 ‘고침’을 의미한다. 좋은 것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간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지켜져 온 순리이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가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는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다. 문제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고쳐야 할 것인가 이다.
꼭 일류대학 출신이어야만 된다는 생각이 틀렸다면 이는 하루 빨리 고쳐야 할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런 면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이 인민을 박해하며 아직도 한반도 안보에 위협이 되는 체제라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꿀 수 없고 따라서 엄격히 보수적이어야만 한다.
캐주얼 복장으로 등원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진보’ 옆에는 아무리 그래도 반바지 차림으로는 안 된다는 ‘보수’가 사려 있다. 아직도 판단은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장석정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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