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악의 역병은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이다. 1347년 이탈리아 시실리 상륙을 시발로 유럽 전역을 휩쓴 이 괴질에 걸려 그 후 5년 동안 당시 유럽 인구의 1/3에 달하던 2,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목과 사타구니의 임파선이 시꺼멓게 부풀어올라 흑사병이란 이름이 붙은 이 전염병에 걸리면 대개 3~4일 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마를 쫓기 위해 교회 종을 밤낮으로 울리고 대포를 쏴대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쥐벼룩으로 옮겨지는 이 역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직 환자를 격리시키고 주변 물건을 불태우는 조치를 취한 일부 도시만 그나마 화를 줄일 수 있었다.
흑사병은 대 재난이었지만 살아남을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도 있었다. 노동 인구가 급감해 인건비가 상승했을 뿐 아니라 임자 없는 물건이 쏟아져 나와 물가가 싸졌기 때문이다. 흑사병은 종교적으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신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고 정치적으로는 비싼 몸값을 요구하는 노동 계급과 이를 주지 않으려는 유산자간의 계급 투쟁을 유발했으며 경제적으로 인건비 절감을 위해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등 사회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중세 끝의 시작을 이 때를 기점으로 삼는 학자들도 있다.
질병이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흑사병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다. 한 때 북미주에만 1,000만 명으로 추산되던 인디언들이 거의 멸종한 것은 백인들의 총칼이 아니라 면역성이 없는 유럽의 질병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14세기 재앙을 몰고 온 흑사병은 17세기 중반까지 주기적으로 유럽을 찾아와 괴롭혔다. 1660년대 뉴턴이 대학을 떠나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구상할 수 있었던 것도 흑사병의 위협을 피해서였다.
흑사병이 왜 그 때 그렇게 유럽에서 창궐 했는 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단지 그 진원지가 중국이라는 점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 후 7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세계가 중국 발 괴질의 위협에 떨고 있다. 올 초 광동 지역에서 첫 희생자를 낸 SARS(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는 현재 26개국에서 5,000여명의 감염자를 내며 확산 일로를 걷고 있다.
베트남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일단 진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사건의 진앙지인 중국에서는 아직 정확한 피해 규모마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베이징 시장과 보건 장관이 환자 수를 은폐 조작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것을 보면 실제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없는 형편이다.
SARS 공포는 테러와 전쟁, 불황과 고유가로 허덕이고 있는 세계 항공, 관광, 호텔업계에는 직격탄이나 마찬가지다. 홍콩의 일부 호텔들은 입실률이 고작 10%에 불과하며 현재 중국 관광은 개점 휴업상태다. 동남아 일대뿐 아니라 중국인이 많이 사는 LA 동쪽 샌개브리엘 일대를 비롯 세계 곳곳의 차이나타운은 비상이 걸렸다.
이번 괴질은 장기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과 유럽, 이중 불황의 위기에 놓인 미국 등 세계 경제가 어려운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고성장을 유지해온 중국을 강타했다는 점에서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올해 8% 대의 중국 GDP 성장을 예측하던 전문가들은 SARS의 여파로 중국 경제가 지난 수개월간 마이너스 성장을 해왔으며 이것이 빨리 잡히지 않을 경우 2~3%대의 저 성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왜 광동 지역에서 병이 퍼지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이 일대를 여행해 본 사람에게는 놀랄 일도 아니다. 껍질을 벗긴 개고기와 머리 잘린 뱀 등 온갖 동물이 길거리 좌판에서 먼지와 오물, 가래에 뒤섞여 널려 있는 것이 이곳이다. 이번 괴질은 원래 닭 등 가축에 질병을 일으키던 병원체 변종이 인간에 옮겨 붙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쥐의 질병이던 흑사병이 인간에 전이된 것이나 원숭이 사이에 유행하던 AIDS가 인간에 까지 퍼진 것과 유사하다.
인간의 질병 퇴치 노력도 대단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병원체의 자구 노력 또한 만만치 않다. 해충 가운데는 살충제에 워낙 적응을 잘 해 살충제를 뿌리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종자까지 나왔다. 인간과 병균과의 긴 싸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 분명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타 당하는 세계 경제가 걱정이다.
민 경 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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