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화창했던 지난 금요일, 친구가 다운타운의 유니언 스테이션 안에 있는 ‘트랙스’(Traxx)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전화해왔다.
생뚱맞게 왠 기차역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그런 곳에 뭐 맛있는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 바빠 죽겠는데 다운타운까지 갔다올 생각을 하니 조금 번거로웠지만 에이, 금요일이니까, 하면서 유니언 역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두시간, 나는 뜻하지 않은 감상에 젖어 새로운 활력을 충전하고 돌아오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유니언 역은 14년전 꼭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색다른 여행을 하자며 남편과 앰트랙을 타고 라스베가스에 다녀왔을 때였다. 기차여행이 낭만적이라는 이야기만 줏어듣고 탔는데 불행히도 행선지를 잘못 잡아 낭만은커녕 황량한 사막 구경만 싫도록 하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알고보니 서부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는 노선을 타야했는데 엉뚱한 곳으로 갔던 것이다.
그때 유니언 스테이션이 어땠었는지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젊은 부부에게 특별한 주의를 끌지 못할만큼 평범했을까, 아니면 이제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인가.
친구와의 약속시간에 대느라 종종걸음치며 역사에 들어선 순간, 온 몸을 타고 전해오는 전율과 흥분으로 나는 일순 발길을 멈추었다. 갑작스런 풍경, 기대치 않았던 감동에 압도되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마저 핑 돌았던 것 같다. 왜 였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왼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며 원고, 원고, 마감, 마감, 전화통을 붙들고 수없이 떠들고 식식거리다가 밖에 나왔을 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오렌지주스를 엎질러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어가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오던 그 슬픔이라 해야할까.
어떤 시인은 우체국 창문앞에서 편지를 쓰고 싶다고 하였지만 기차역 대합실에 선 나는 돌연 떠나고 싶어졌다. 어디론가 멀리, 내 존재의 아득한 고향을 향하여.
늘 떠나고 싶었네/ 늘 돌아오고 말았지만/ 이 대합실에 서면/ 꼭/ 떠나고 싶었네/ 앞으로도 결국은/ 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하며/ 살아야 하겠지만/ 정말로 정말로/ 떠나고 싶었네/ 모든 것으로부터 <신경림의 ‘대합실’>
살면서 떠나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번이었을까. 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인생으로부터, 아니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었지만 한번도 떠나보지 못하고, 떠남을 상상도 하기 전에 돌아오기부터 하는 평범한 주부들의 비밀스런 도피에의 유혹을 그대 남편들은 알기나 하는가.
우중충하리라고 생각했던 대합실은 너무도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예술작품 같은 대리석 바닥이 반들반들 거울처럼 빛나며 내 앞에 길게 깔려 있었다. 그 위를 걸으며 올려다본 천장 또한 경이로웠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부분의 유니언 스테이션 건물들이 그러하듯 둥근 돔 형태의 천장은 몇층 높이만큼이나 높은데도 불구하고 낡은 구석하나 없이 쾌적하게 손질돼있었다.
드넓은 대합실은 한산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붐비지도 않았다. 조용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적당한 소음들이 홀을 울리며 지나갔다. 떠나는 사람들, 돌아오는 사람들이 편안한 차림으로 짐을 끌고 오갔다. 난리북새통 같은 공항의 풍경과 전혀 다르게 느껴진 것은 순전히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싶은 중년여인의 센티멘탈리즘 때문이었을까.
‘미친X 널뛰듯이’ 일하고, 또 일하고, 뺑뺑이 돌듯 돌아가다가 오랜만에 맞닥뜨린 한가한 떠남의 길목에서 나는 일상과 헤어졌다 돌아오는 아득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역 대합실 한가운데 위치한 ‘트랙스’는 매우 괜찮은 식당이었다. 주방장의 솜씨가 살아있는 메뉴도 좋고, 프레시한 음식 맛, 요리의 고급스런 프리젠테이션이 모두 기대이상이었다. 놀라운 선택으로 나를 감동시킨 친구와 헤어지면서 깊고 오랜 포옹을 나누었다.
햇살이 너무 부셔 인생이 허무해지는 날, 삶이 공회전한다고 느껴지는 날, 밥하기 싫은 아줌마가 우렁각시와 신데렐라의 꿈을 꾸는 날, 나는 또다시 유니언 스테이션에 가고 싶다.
대합실의 키 큰 의자에 몸을 묻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나를 실어 해저무도록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상의 탈출, 그 아름다운 도피의 기쁨을 싫도록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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