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들 시집가면 어떻게 밥해먹고 살지 걱정이다”
언니가 가끔 날 붙들고 하는 소리다. 내가 이민올 때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이던 조카들이 어느덧 혼기를 넘긴 처녀들이 되었다. 둘다 시집 갈 생각은 안하고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약사인 큰딸이나, TV방송기자인 둘째나, 부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해주는 밥만 먹고 지낸다.
더 나쁜 것은 큰애와 작은애의 식성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달라, 언니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딸의 입맛에 맞춰 두 종류의 음식을 해대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큰애는 완전히 양식 체질, 작은애는 한식 체질인데 “어쩜 달라도 저렇게 다르냐”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도 언니는 두 아이 먹을 것을 늘 따로 해주어 오늘의 화를 자초했다. 나 같으면 식성 무시, 하나로 통일해 안 먹는 놈은 굶겼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키워놓고 이제 와서 걱정하는 언니에게 내가 하는 말은 늘 똑같다.
“언니, 날 봐, 날! 걱정 꽉 붙들어매고 시집이나 잘 보내”
아무것도 안 해본 딸이 시집가면 어떡하나, 걱정인 어머니가 있다면 지금부터 걱정을 잡아매시라고 당부하고 싶다. 장담하는 이유는 내가 바로 살아서 걸어다니는 증인이기 때문이다.
처녀시절 정숙희? 그녀가 결혼해서 밥을 해먹고 살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치 않았었다. 이제 와서 인정하지만 혼자 오만 잘난 체를 하면서 멋은 있는대로 부리고 성질은 또 얼마나 대단했던지, 저 여자한테 밥은커녕 빵도 얻어먹기 틀렸다고 지레 뒷걸음질한 남자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맛있다는 식당만 찾아다녔지, 요리라고는 단 한가지도 해본 것이 없었으니 언니집에 6년 넘게 얹혀 살면서도 기껏 했다는 것이 쌀 씻어 전기밥통에 앉히기, 김 재어 굽기, 라면 끓이기, 그게 다였다. 그러니 나자신도 결혼을 하면서는 신랑과 장차 태어날 아기가 늘 배고프거나 비리비리한 모습으로 살게될까봐 속으로 엄청 떨고 있었다.
그런데 신혼살림을 차린 첫날, 나는 무지하게 장을 봐다가 냉장고에 가득 채워넣고는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무엇인지를 굽고 하면서 상을 차렸다. 무조건 냄비에 물을 붓고 고기를 썰어넣고, 멸치도 넣고, 조개도 넣고, 평소 찌개에서 봤다고 생각되는 모든 재료-감자, 호박, 오뎅, 양파, 당근, 고추, 피망, 버섯, 두부 등등을 다 넣고 된장을 풀어 끓였다. 자꾸 썰어 넣다보니 냄비가 넘치도록 양이 많아져 당황했지만 맛은 놀랍도록 훌륭해 첫날부터 남편을 감격시켰다.(그렇게 많은 재료를 넣었는데 맛이 나쁠 수가 있겠나)
우연히 그리 되었겠지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먹어본 혀가 있으면 맛을 낸다’고, 그저 이걸 해볼까 생각하고 이것저것 넣어 지지고 볶으면 음식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왠만한 음식을 만들어 실패해본 일이 없다. 물론 처음엔 정식도 아니고 우습게 되기도 했겠지만 당시로서는 내가 요리를 한다는 사실에 남편도 놀라고, 시어머니도 놀라셨고, 언니도 놀랐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다. 내가 밥을 다 하다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신기했던지, 그게 또 하나의 잘난체 거리가 되어서 한동안은 그 알량한 실력으로 사람들을 불러다 해먹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결혼식 올린 지 한달만에 겁도 없이 순전히 내가 차린 잔치상으로 시댁어른들을 모두 초청해 집들이 했다는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요리가 좋아서가 결단코 아니었다. 오로지 ‘밥은 여자가 해야한다’는 다소 구시대적인 의무감과 언니들이 결혼후 헌신적으로 밥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려고 하는 의지와 책임감만 있으면 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집에서 엄마가 음식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딸들은 다 엄마처럼 하게 되어있다. 엄마는 알게 모르게 딸의 롤모델인 탓이다.
특별히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한, 한인가정에서 자란 딸들은 대부분 처녀때의 나와 비슷할 것이다. “시집가면 싫도록 할텐데 벌써부터 시키기 싫다”고 부엌에 안 들여보내는 어머니들도 있고, 본인이 싫어서 손끝에 물 한방울 안 묻히는 아가씨들도 있다. 그러나 가면 다 하게 돼있다. 저 좋다고 결혼한 남편을 굶기거나 허구헌날 사먹게 할만큼 뻔뻔한 여자도 드물고, 또 그렇게 뻔뻔하면 남편을 시키면 될거 아닌가.
그렇지 않더라도 요즘 젊은이들이 어디 옛날 같은가. 음식 못한다고 구박할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어디 있으며 그게 무슨 큰 흉이 되나 말이다. 요리가 패션인 세상, 돈만 잘 벌면 여기 저기 좋은 식당 찾아다니며 사먹는 재미도 만만치 않은 세상인데 뭐 그리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평소 부엌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엄마일수록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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