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광장은 ‘베를린의 압구정동’이라 불릴 만하다. 한때 동서 베를린 경계의 버려진 땅이던 이 곳은 통일 후 다임러 크라이슬러 본사, 소니 센터 등 최첨단 건물이 들어선 멋쟁이 동네로 변했다. 어디에 앉아도 1등석 같은 느낌이 들게 설계한 베를린 필하머닉 음악회관과 독일 최고의 갤러리로 손꼽히는 쿨투르포룸 등도 모두 인근에 있다. 온갖 모양을 낸 고층 건물 위에 강철 천막이 씌어진 광장 모습은 초현대식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옛날 베를린 장벽이 있던 경계선을 따라 걸어보면 동베를린 쪽이 더 새 건물을 짓느라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낡고 볼품이 없어 다시 짓지 않고는 제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모델링이 되지 않은 동베를린 일대는 “이곳이 과연 유럽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라하다.
지상의 베를린 시내는 유서 깊은 고도답게 웅장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지만 땅 밑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베를린 시민들의 발인 지하철의 창이란 창은 밖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다. 단순히 페인트를 뿌린 것이 아니라 송곳으로 유리를 긁어 놓았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독일 민족다운 철저함이 엿보인다. 안내판과 복도, 가판대 등도 10년 이상 한번도 보수를 하지 않은 듯 낡고 지저분하다.
외국 방문객에게 도시의 첫 인상을 심어주는 지하철을 이처럼 엉망으로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시 정부가 이를 관리할 재정 능력이 없거나 낙서범을 제재할 의지가 없거나 아니면 둘 다임을 보여준다. 사회가 내면적으로 깊이 병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마치 줄리아니 이전의 뉴욕을 보는 듯하다.
독일이 중병에 걸려 있다는 조짐은 지하철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다우존스라 할 수 있는 DAX 지수는 3년 전에 비해 70% 이상 떨어져 있다. 경제는 만성적인 고실업과 저성장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컴퓨터, 생명공학, 우주항공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거의 없는 상태다.
20세기 초만 해도 ‘양자 역학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에서 ‘상대성 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은 독일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 간 노벨 물리학상을 탄 독일 과학자는 ‘가물에 콩 나듯’ 찾기 힘들다. 간혹 독일 이름을 가진 사람도 대부분 미국 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 독일 대학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반성은 독일에서 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문가들은 현 추세가 계속되면 금세기 말 독일 인구는 8,000만에서 4,000만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독일의 멕시칸’인 터키인 수는 이미 500만을 넘었으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이 땅이 누구 땅인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다. 인구는 계속 줄어 노동력은 부족한데 그렇다고 외국인을 더 수입하자니 ‘단일민족’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막대한 통일 비용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제2차 대전 패전 이후 독일의 비약적인 성공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내려온 근로에 대한 존경과 정직함, 높은 교육열 등의 전통에 에르하르트 총리의 시장 친화적인 정책이 맞물려 이뤄진 것이다.
1년에 두 달에 걸친 유급 휴가와 ‘직원 해고하기가 이혼하기보다 힘든’ 노동시장의 경직성, 고율의 소득세와 후하기 짝이 없는 실업수당 등이 독일인들의 근로 의욕과 창의를 억누르고 있다. 요즘 같이 국가간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이런 자세로 언제까지나 경제적 우위를 유지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독일이 앓고 있는 질병은 독일만의 것이 아니라 ‘낡은 유럽’의 공통된 현상이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30년 전 소위 ‘영국병’을 치르다 대처라는 의사에 의해 큰 수술을 받고서야 겨우 목숨을 건졌다. 독일은 인구로나 경제력으로 보나 아직 유럽 최대 국가다. 독일이 살아나지 않는 한 유럽의 활기도 없다. ‘독일병’을 하루 속히 고칠 명의는 없는 것일까.
<베를린에서>
민 경 훈 <편집위원>
kyu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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