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없는 이라크 파병
이창주/국제 한민족 재단 상임의장
이라크 전쟁 이후 북미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 영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악의 축’, 독재자 제거, 대량살상 무기, 이라크 해방 등이다. 이는 북한 체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워싱턴의 매파들은 북한 문제가 이라크와 동일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서는 전쟁 수단을 사용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평화적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 평화 해법에는 군사 행동이 병행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북한의 자연 붕괴와 인위적 붕괴 두 가지 시나리오를 논의하여 왔다. 후자에 무게를 둔 미국의 대북 전략은 내부 반란 또는 봉기에 의한 인위적 붕괴 시나리오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입안이라기보다 94년 핵 위기 시 미국이 북한 공격 직전까지 갔던 사태에 기인한다. 부시 행정부는 이 때 상황에 관심을 갖고 체제 붕괴를 실행화 하는 구상을 갖게 된 것이다. 중국의 강한 반발로 좌절되었지만 북한 주민 대량 탈북 프로젝트가 그 한 예다. 지금도 워싱턴은 이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체제 몰락 환경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전 파병을 발표하면서 한반도 전쟁 방지라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의 요구에 맞서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한국보다 훨씬 대미 의존적이고 개인적으로도 친한 멕시코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이 부시의 전쟁 동참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 국가 지도자의 신념과 리더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파병을 주장하는 한국 정치인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면서 전후 복구 경제 특수를 들었다.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이런 국익과 이런 정치 수준은 비판과 부끄러움의 대상이 된다.
미국 주도의 새 법질서
한원구/미주 경남대 극동 문제 연구위원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 다발로 일어난 테러 사건은 1812년 영미 전쟁 때 영국군이 백악관을 불태운 후 처음 미 본토에 공격이 가해진 일이었기 미국인들의 흥분과 공포, 애국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 후 이라크를 둘러싼 유엔 안보리의 의견 불일치는 미국을 일방주의로 치닫게 하였고 이로 인해 유엔 법질서는 재편 위기를 맞게 됐다.
국가가 지향하는 최고의 도덕률은 이익 추구다. 국가 간의 분쟁은 이익 추구에서 생기고 이 갈등은 힘으로 해결된다. 따라서 힘의 변동은 새로운 사태의 시작이며 끝이고 전쟁이 끝나면 패자 위에 승자가 군림하는 것으로 전후 질서가 성립한다.
오늘날 미국은 세계의 정치 군사 경제력을 좌우한다. 그 힘은 유엔 법 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동시에 새 질서 창설의 권위도 될 수 있다. 이를 ‘질서 제정 권력’이라고 불러도 좋다.
후세인 정권의 대량 살상 무기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한다면 앞으로 이를 보유하려는 나라들에 대한 선례가 될 것이어서 그 후로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생각인 것 같다.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 정부는 북미 대화를 주선하는 일에만 매달려 왔다. 내 집 안 일인데도 남의 집 불 구경하는 자세를 취해 온 것이다.
이는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양자 대화에 백지 위임장을 써주고 태연하게 관망하는 것과 같다. 어찌 이를 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가. 한국의 3자 협의 기구에 당연히 주인으로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징용 배상 우리 모두의 책임
정연진/일본군 위안부 징용 정의회복 위원장
해외 한인 사회의 시발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시작되면서 항일 투쟁을 위해 혹은 침략의 사슬을 피해 한반도를 떠났다.
또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무렵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노역장의 노무자로, 성 노예로, 총알받이로 한반도를 떠나야 했다.
일본이나 동남아, 사할린의 경우에는 징병, 징용에 동원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국에 가지 못한 채 버려졌고 미국의 경우에도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사탕수수 농장의 일자리를 찾아 조국을 떠난 하와이 이민자들이 이민 사회의 선조를 구성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 문제는 그 피해 규모를 볼 때 민족적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다.
한국 재야 사학자 추산에 의하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에서 강제 연행된 피해자 수는 해외로 끌려나간 사람이 약 100만에서 150만, 한반도에서 강제 동원된 사람 600만 등 도합 700만에서 750만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측 집계에 따르면 이 수치는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32%인 840만에 이른다.
광복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피해자들은 눈물과 한의 세월의 보내고 있다. 일본열도에서는 아직도 계속 징용자들의 유골이 발굴되고 있음에도 우리들은 이것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원하는 피해자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이 있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부풀려진 대북 송금 의혹
김용현/LA 평통 부회장
김대중 정부가 끝나갈 무렵 불거진 대북 송금 파문은 공들여온 햇볕정책과 김 대통령의 업적이 일순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줬다. 몇몇 언론들이 대통령을 짓밟고 끌어내리는 모습은 민족의 문제를 저런 식으로 다뤄도 좋은가 하는 분노마저 일게 했다.
국민의 혈세로 만든 돈을 여야 합의 없이 한 기업을 통해 일방적으로 북쪽으로 전달하게 한 것은 잘 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해당 기업이 해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북 송금의 목적이 한반도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족의 장래를 위한 목적이었다면 대통령에 대한 비상 위임 차원에서 풀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독일에서도 통일 과정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동서 교류가 공개 리에 추진되었으나 동독 당국에 체포된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대가로 31억 마르크의 돈이 비밀리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25년 동안이나 서독 정부가 이를 비밀리에 부친 것은 공개될 경우 동독의 권위가 실추돼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몇 차례 정권이 교체되는 와중에서도 언론은 끝까지 입을 다물다가 통일된 후에야 비로소 보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민족의 문제, 통일의 문제를 우선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분단 국가의 언론은 정파적 이해 관계나 기업의 상업주의에 우선해 민족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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