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제8회 방콕 아시안게임 때로 기억된다. 1978년 12월에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은 북한과 나란히 공동우승을 했다. ‘반공’이 정권의 충직한 효자노릇을 하고, 의도적으로 부추겨진 스포츠 열기가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던 시절, 남북한 대결 경기는 대단히 민감한 이벤트였다.
신문사 선배중 한사람이 근처 다방에서 그 결승전을 시청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된 경기 도중 어느 한순간, 그 선배가 엉겁결에 박수를 쳤다. 문제는 상황이 북한 대표팀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그 순간 다방에 있던 모든 눈들이 나를 노려보는데, 섬뜩하더군”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난해 10월,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 때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북한선수 응원단을 응원하는 응원단이 생길 정도로 한국민들은 북한 사람들을 살뜰하게 반겼다. 그 운동장에서 누군가가 ‘반공’을 내세우며 북한팀에 적대감을 보였다면 필경 70년대 다방에서의 눈길과는 비교도 안되는 섬뜩한 시선의 화살받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남북한이 분단 대치상황이라는 사실에는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고, 남과 북의 사람들이 동족인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주도한 남북화해 무드, 그리고 근년 유난히 강해진 민족적 자긍의식이 큰 역할을 한 결과이다.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변화이기는 한데, 한편으로 섬뜩한 것은 그 도도한 획일성이다.
197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북한을 적으로 보는 의견, 동족으로 보는 의견이 편하게 토로되고 수용되어져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외부적 압력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면 혼자 다른 의견을 고집하기가 어려운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좋은 예이다. 허영심 많은 임금은 사기꾼 형제에게 속아 세상에서 가장 값진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걸쳤는데 누구도 ‘임금님이 벌거숭이’라는 말을 못한다. 모두가 ‘보인다’고 하면 ‘안보인다’는 내 판단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살펴본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솔로몬 애시라는 심리학자의 ‘순응주의’ 실험이다.
애시는 의자 9개를 놓고 실험대상자를 끝에서 두번째 의자에 앉게 했다. 나머지 8명이 들어와 의자에 앉은 후 애시는 카드 2장을 보여주며 차례로 질문을 했다.
첫번째 카드에는 선이 한개, 두번째 카드에는 각각 2인치씩 차이 나는 3개의 선이 그려져 있었다. 질문은 이들 선중 어느 선이 첫 번째 카드의 선과 길이가 같은가 - 한눈에도 답이 분명한 시시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실험대상자가 보니 자기 앞의 7명이 하나같이 틀린 대답을 했고 틀린 답까지 모두 같았다. 그는 고민을 하게 된다. 다른 7명의 의견과 자신의 판단중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
실험대상자가 모르고 있는 것은 나머지 8명은 모두 애시의 조수들로 미리 짜고 틀린 대답을 했다는 사실이다. 18명의 실험대상자들중 12명이 남들을 따라 틀린 답을 선택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보통 두가지 정보를 고려한다. 나의 판단, 그리고 다수인 남들의 판단이다. 대개는 “남들이 모두 그렇다면 그런게 아닐까”라며 자신의 판단을 접는 쪽으로 기울어 진다.
유행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 “요즘 저 디자인이 유행이다.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을 듣고 나면 덥석 그쪽으로 손이 가는 경험을 누구나 한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반전 의견을 짜증스러워 하는 목소리들이 미국 보수진영 일각에 있다. 전시는 특히 소수 의견이 기를 펴기 어려운 때이다.
민주사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획일주의이다. “남들이 다 그렇다는데…”는 일종의 정신적 직무유기이다. “국방 전문가들이 그렇다는데…”“미국민의 과반수가 지지한다는데…”가 각자의 판단을 지레 포기할 구실은 되지 않는다.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는 사회이고, 그것은 미국의 자랑스런 전통이기도 하다.
개전 다음날인 지난 20일 뉴욕타임스 사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우리가 이 전쟁을 하는 것은 이라크에 언론의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지 국내 언론의 자유를 억누르기 위한 것은 아니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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