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은 석유 전쟁에 다름 아니다. 아랍 민주화 운운은 미국이 그 시뻘건 탐욕을 감추기 위해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비(非)미국인들의 견해다.
83%의 러시아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87%의 프랑스인이, 85%의 독일인이, 또 79%의 스페인인이 같은 생각이다. 한 국제 여론조사 결과다.
전쟁은 그래도 계속되고 있다. 사담 후세인은 결국 제거될 것이고…. 그러면 사담 이후 이라크는 좋아질 것인가, 더 나빠질 것인가.
여론조사는 계속된다. ‘좋아진다’가 ‘나빠진다’를 73대14로 압도했다. 프랑스인들의 대답이다. 독일인들도 비슷한 반응이다.(75대14) 스페인인들도 거의 같은 생각이다.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을까.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제국주의 정책의 발로다. 그 주장이 맞는다면 그런 전쟁의 결과로 이라크가 좋아진다는 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아 하는 말이다.
유럽인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일단 접어두자. 이번에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등 온건파 6개 아랍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아랍 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6%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절대 다수의 생각은 다르다. 석유 전쟁이고,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에 복속시키기 위한 흉계다. 이게 그들의 확신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절대 다수의 응답은 이렇다. 회교 성직자의 정치적 입지를 넓혀야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건 뭘까. 이슬람 원리주의가 그만큼 아랍인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는 시각은 비슷하다. 그런데 사담 이후를 보는 눈이 다르다. 서구와 아랍권의 의식 차이인지 모른다. ‘…그래도 민주화는 될 것’이라는 게 서구의 시각이다. 아랍권은 달리 보고 있다.
사담 이후 이라크에 들어서는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닌 이슬람 원리주의 체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다. 아랍권 전체에서 어느 날 일제히 민주적 선거가 실시됐다고 하자. 어느 세력이 정권을 잡을까. 민주주의 세력이 아닌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친서방 아랍지도자들이 우려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지난 92년 알제리 사태가 그 단편적 예다. 선거는 급진적 이슬람 원리주의가 승리했다. 그러자 곧 군부가 들고 일어섰다. 그 결과는 유혈의 내전이다.
세속 정권은 아랍권에서 모두 실패작이다. 사우디 왕정이 그렇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도 헐떡이기는 마찬가지다. 독재, 탄압, 부패에만 능했지 이렇다 할 정책적 대안이 없다.
분노만 확산된다. 그 틈새를 이슬람 원리주의가 파고든다. 반대로 위축되고 있는 게 친미성향의 계층이다. 관료층, 기업인, 학자, 온건파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눈치만 보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로서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빵 문제 해결의 대안도 없이 ‘이슬람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외치고 있을 뿐이다. 공허한 슬로건이다. 아랍형 포퓰리즘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관심의 포인트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인의 반(反)전, 반미주의는 어느 편에 가까운가가 관심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서구형의 모방’에서 시작돼 어딘가 아랍형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화두는 ‘민족’이다. 민족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고 또 해결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비교컨대 ‘이슬람만이 모든 것의 해결’이란 아랍형 분위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동시에 강조되어 온 게 민족의 자존(自尊)이다. 반미주의 확산은 이 상황에서 필연의 수순이다. 외세, 즉 미국과 민족자존은 상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정교한 수순 뒤에 가려져 있는 좌파 논리다.
이라크전 개전을 전후해 다시 시위가 격렬해 지고 있다. 반전 시위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한국의 정치권이 몸을 사리고 있다. 이라크 파병안 처리를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여·야 구별이 따로 없다. 반전구호 뒤에 숨겨진 반미정서에 놀라 눈치만 보고 있다.
확실히 아랍의 정치권을 닮은 모습이다. ‘이슬람의 이름으로’란 구호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시대착오적 정치인들의 모습 말이다.
“민중은 절대로 옳다는 신념에 변화가 생겼다.” 한 국내 소장 정치학자의 고백이다. 여론이라고 모든 게 옳다는 보장은 없다.
옥 세 철<논설실장>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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