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16일 바그다드 상공은 불꽃으로 뒤덮였다. 50만을 헤아리는 다국적군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을 몰아내기 위한 첫 번째 걸프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불꽃놀이의 축포가 울려 퍼진 곳은 바그다드만은 아니었다. 뉴욕의 월가를 비롯한 세계 증권 시장 또한 일제히 상승세로 돌아섰다. 1990년 여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함께 시작된 미국의 불황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2000년 3월 터진 하이텍 버블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거품이었다. 이 버블이 부풀기 시작한 것은 걸프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세계 최초의 전자 증시 거래소인 나스닥이 등장한 것은 1971년이지만 일반에 익숙한 이름으로 등장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걸프전의 총성이 울리기 직전인 1991년 1월 14일 하이텍 주식이 주로 상장돼 있는 나스닥 지수는 355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9년 사이 1,500%라는 경이적인 상승율을 기록하며 5100을 거뜬히 넘어선 것이다. 월스트릿 저널이 증시 기사를 쓰면서 당시 인기 만화 영화였던 ‘토이 스토리’ 주인공 버즈 라이트이여(Buzz Lightyear)의 모토인 ‘무한을 넘어서!’(To infinity and beyond!)를 제목으로 뽑은 것도 그때다.
그 후 꼭 3년 뒤인 지금 나스닥은 1300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미 증시에서 날아간 총 주가 손실액은 10조 달러에 달한다. 모든 미국인이 1년 간 일해 만들어낸 물건과 서비스(GDP) 총액과 맞먹는 액수다.
부시가 이라크를 향해 최후통첩을 발표한 지금 투자가들의 관심은 제2의 걸프전이 주가 폭등과 경기 회복을 가져온 첫 번째 걸프전의 재판이 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올 들어 세 달째 하락에 하락을 거듭하던 미 주가는 지난 주 외교적 해결이 수포로 끝나고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 확실시되면서 폭등세로 돌변하고 있다. 아직 총소리가 나지도 않았는데 지난 1주일 사이 다우 존스 주가 지수는 800 포인트 가까이 상승, 12년 전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채권에 몰려 있던 돈이 빠져나가면서 모기지 금리의 기준이 되는 연방 채권 수익률 또한 급속히 치솟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걸프전에 비해 미군의 전력은 말할 수 없이 향상됐고 이라크 군은 형편없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별 희생 없이 수주 내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크게 올라 있는 원유가도 내릴 것이고 일반 투자가나 소비자들의 심리도 안정돼 경기가 회복될 것이란 전망이다.
과연 그럴까. 90년의 불황과 지난 수년간의 불경기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우선 국제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경기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고 있었고 유럽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걸프전 경비의 상당 부분을 이들 나라가 부담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14년째 계속된 장기 불황에 빠져 있으며 독일 등 주요 유럽 국가도 전후 최악의 불경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차이는 현재 미국의 불황이 통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상 최악의 버블이 터진 후유증의 결과라는 점이다. 미국에서 이와 맞먹는 규모의 버블이 마지막으로 터진 것은 1929년이다. 미국이 그로 인한 고통의 터널에서 벗어나는 데는 20년이 넘는 긴 세월과 2차 대전이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버블의 후유증이 할아버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일본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미국은 일본과 다르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일본인은 대다수가 자기 집을 갖고 있고 몇 년 먹고 살 돈을 저축해 두고 있지만 미국인은 모기지 페이먼트에 시달리며 저축율은 0%에 가깝다. 지난 수년간 유례 없는 부동산 호황에도 불구하고 미국 모기지 부담은 오히려 늘어났다. 집 값 오른 부분을 재융자해 뽑아 썼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설사 예상외로 쉬운 승전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호경기를 기대하기는 이르다. 전쟁 유포리아에 휘말리지 않는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민 경 훈 <편집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