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학에서 오래 교수생활을 하고 계신 분이 몇년전 안식년을 맞아 한국의 대학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활달하게 자유 토론을 즐기는 미국 학생들에 비해 한국 학생들의 발표력이 떨어지는 것은 예상했던 일. 그 자신도 학창시절 한국에서 비슷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별로 낯선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놀란 것은 단과대학 교수회의에 들어가서였다.
“학장이 ‘이렇게 합시다’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찬성하는 말 몇마디가 있을 뿐 교수들이 한마디도 안해요. 그렇게 침묵하던 교수들이 회의장만 나오면 달라집니다. 저마다 자기 의견을 말하며 불만들을 털어놓는 겁니다”
토론의 열기가 의사당 못지 않은 미국대학 회의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를 할수가 없더라고 그는 말했다.
“미국대학에선 총장이 있건, 학장이 있건 회의 중에 할 말을 못하는 일은 없지요. 자기 의견들을 편안하게 말합니다. 지나가다 총장과 마주쳐도 ‘하이’하며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눕니다. 한국에서는 총장이 보이면 교수들이 15m 앞에서부터 긴장을 하더군요”
총장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90도로 인사하는 교수들의 태도를 보면서, 토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교수회의의 분위기를 보면서 그는 “(민주적이어야 할) 대학문화가 이래서 되겠나”싶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몇 년전 일이니 지금은 개선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언어에서부터 상하가 엄격히 구분되는 한국에서 뿌리깊은 권위주의가 쉽게 사라질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돈이건, 직위이건, 나이이건 성별이건 힘이 쏠린 곳에는 어김없이 권위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는 한국에서 지난주 ‘사건’이 있었다. 대통령과 젊은 검사들이 공개 토론을 했다.
토론이란 기본적으로 민주적 사고방식이 있어야 가능하고 민주적 사고란 인격적 대등성을 바탕으로 한다. 국가 권위의 상징인 대통령이 새파란 평검사들과 토론을 벌인 ‘사건’에 대해 반응은 두가지였다. “한국도 많이 달라졌다. 신선하다”는 긍정적 반응과 “권위를 다 무너트리자는 건가. 콩가루 집안이 되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였다.
TV로 중계된 토론 장면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중의 하나는 ‘권위’에 대해 아무도 편하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권위가 상식이나 합리성보다도 우위를 차지하던 수직적 권위사회가 수평적 민주사회로 바뀌는 과도기를 통과하면서 권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두가 혼란스런 모습이다.
검사들은 권위를 너무 도전의 대상으로 의식한 나머지 기본적 예의도 없이 행동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필경 권위를 다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려 했을 대통령은 검사들의 감정적 지적 앞에서 불쾌감과 모욕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말 따로 행동 따로 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했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수평적 리더십을 강조했는데 막상 그런 자리에 나가 보니 무척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권위에 마구 도전하는 검사들, 도전을 이성으로는 수용하면서 감정으로는 소화해내지 못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사춘기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연상되었다. 머리가 조금 컸다고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녀, 10대의 반항적 기질을 이해는 하면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열받는 부모 - 이중문화권인 이민가정에서는 특히 문제가 된다. 부모의 권위를 무작정 내세우자니 아이가 더 반항적이 되고, 권위를 내려놓자니 아이의 버릇을 못 가르칠까 불안한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심정이다.
‘권위’는 손바닥 위의 모래 같다. 없는 듯이 가만히 두면 상대방이 먼저 알아주지만, 내가 움켜쥐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린다. 전자가 순수한 ‘권위’라면 후자는 ‘권위의식’이며 ‘권위주의’이다.
살아 생전 테레사 수녀는 많은 국가 지도자들의 초청을 받았다. 훅 불면 날아갈 듯 작은 체구의 노수녀 앞에서 지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양순해지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이들 힘센 자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진짜 권위’일 것이다.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사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칭찬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찬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나를 해방시키옵소서”라고 테레사 수녀는 기도했다. ‘진짜 권위’는 그렇게 얻어진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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