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인기가수 장세정씨가 며칠 전 LA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82세. 일제시대인 1937년 가요계에 데뷔 했으니까 그야말로 ‘왕년의 인기가수’다.
1930년대 가요계의 최고 스타로는 남자가수에 고복수, 남인수, 김정구, 여자가수로는 이난영, 장세정, 황금심이 있다. 고복수가 부른 노래 중에 ‘타향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가사내용이 이렇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10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나는 당시 태어나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노래만 누가 부르면 좌석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동경에 유학했거나, 일본군에 징용 당했거나, 독립운동 등 이런저런 이유로 연변과 하얼빈을 떠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타향살이’의 가사내용이 구구절절 가슴에 스며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때는 조국이 해방되면 모두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외국은 곧 타향이었다. 그러니 부모님을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이 오죽이나 죄의식을 느꼈을까.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도 그래서 유행되었다.
평양 출신인 장세정씨는 “연락선은 떠난다”로 데뷔했는데 이 노래는 일본 유학 가는 애인을 부두에서 전송하는 여자의 애틋한 마음이 그려져 있다. “쌍고동 울고 울어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하는 내용인데 당신과 헤어져 있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며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지조가 담겨져 있다.
“너도 울고 있지 말고 네 갈 길로 가, 나한테 귀찮게 매달리지만 말고…” 하는 요즘 태진아의 노래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노래사전을 찾아보니 HOT의 ‘전사의 후예’는 “아니 니가 뭔데 나를 때려, 난 이제 벗어나고 싶어”라며 반항하는 여자상을 그리고 있다.
6.25 피난시절 미국은 한국인의 동경이요 꿈이었으며 미주교포하면 선망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전쟁고아들이 미국에 입양 가는 것을 보고 “나도 고아나 되었으면” 하고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히트 친 것이 장세정씨의 ‘샌프란시스코’와 ‘아메리카 차아니타운’이라는 노래였다.
“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곤대는 별 그림자…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샌프란시스코의 가사)
당시에는 거리에 미국 여성이 걸어가면 신기하게 보여 사람들이 뒤따라가며 구경하기도 했다. 또 미국인들이 보낸 옷들이 ‘구제품’이라는 명목으로 시내에 흘러 나왔는데 누가 멋쟁이 복장을 하면 “구제품이지?” 하고 묻게 마련이었다. 미국인들이 입던 옷까지 환영을 받았으니 미국 숭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신세대는 짐작이 갈 게다. 명국환이 부르는 ‘애리조나 카우보이’라는 노래가 히트 친 것도 미국 숭배(?) 무드 때문이었다.
이때 미군 상륙과 함께 들어온 것이 팝송이었으며 페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이 유행되기 시작해 몇년 후에는 폴 앵커의 ‘다이애나’와 엘비스의 ‘러브 미 텐더’로 이어졌다.
대중가요에는 시대의 흐름과 유행이 담겨져 있다. 고복수, 남인수, 이난영씨의 노래는 일제 때 조선민족의 설움을, 장세정씨의 노래는 6.25 피난시절 미국을 동경의 나라로 떠올리던 사회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에서 반미무드가 번지고 있고 ‘fucking USA’라는 노래까지 생겨났으니 세상 정말 달라졌음을 실감케 한다.
1930년대 가수로는 마지막 별인 장세정씨는 자신이 노래 부르던 꿈의 나라 미국에 와 70년대에 LA에서 은퇴공연까지 가졌으니 소원을 푼 셈이다. 그의 노래에서 한국과 미국의 ‘어제와 오늘’을 읽는다.
이철주 필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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