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5월 10일 파리 시가는 흥분과 환호의 도가니였다. 제5공화국 하에서는 처음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프랑솨 미테랑이 지스카르 데스탱을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엘리제궁의 주인이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의 ‘진보적’ 지식인과 ‘못 가진 자’들은 기쁨과 기대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약관 30살의 나이로 장관직에 오른 미테랑은 정치인으로는 물론 문필가로도 명성을 날렸으나 숱한 패배도 맛봤다. 1965년 드골과 대통령직을 놓고 한판 붙었다 나가떨어지고 1974년에는 지스카르 데스탱과 맞섰다 아슬아슬 하게 석패했다. 미테랑은 당선이 확정된 후 프랑스 좌익의 사부 장 조레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오랜 묵념을 드렸다. ‘가진 자’와의 싸움과 자본주의와의 결별이라는 숙원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미테랑은 집권 후 대대적인 국유화와 산업 통제, 막대한 사회 복지 예산 증액과 중과세 등 선거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임금을 고정시킨 채 근로 시간을 줄이고 유급 휴가를 4주에서 5주로 늘리는 등 근로자를 위한 선심 정책도 폈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불고 있던 시장주의에 바탕을 둔 레이건-대처 혁명과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는 이 실험을 세계 지식인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재정 파탄과 자본 탈출, 고실업과 경기 침체였다. 뒤늦게 과오를 깨달은 미테랑은 불과 2년 만에 이를 대부분 철회하고 원위치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시장 원리를 바탕으로 한 개혁을 도입했다. 이를 ‘큰 U 턴’이라고 부른다.
미테랑의 꿈을 좌절시킨 것은 생산성 향상 없는 임금 상승은 기업의 도산을 부른다는 경제적 현실이었다. 사방에서 회사가 문을 닫고 노조는 임금 투쟁으로 날을 새는 곳에 자본은 모여들지 않는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극소수 학자들 입에서나 오르내리던 20년 전에도 미테랑은 국제 자본의 이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컴퓨터 키보드를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지금 경제 주권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시장 친화적 정책을 쓰지 않는 정부는 세계 금융 시장에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는 것과 때맞춰 SK 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구속됐다. 노 대통령이 재벌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음을 감안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한국의 재벌은 지난 40년 간 경제 발전을 위해 공도 세웠지만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 중 가장 큰 죄는 권력과 결탁해 금융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수많은 중소기업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한국의 재벌 개혁이 진정으로 이뤄지려면 금융기관을 독립시켜 정치적 입김이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이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게 해야 한다.
집권 한 후 재벌을 잡아넣는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이래 한국 집권자들이 예외 없이 해 온 관행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괘씸죄에 걸린 몇몇 인사 손보기나 재벌 길들이기 차원을 넘지 못했다. 재벌 2세라도 법을 어겼으면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같은 법을 어긴 다른 기업인들도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한다. 여기 저기 법망을 처 놓고 이를 선택적으로 집행하는 것은 근본적인 재벌 개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재벌 개혁과 함께 노무현 정부가 반드시 이뤄야할 것은 노동 시장의 개혁이다. 근로자가 일자리를 보장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업의 존재 이유는 근로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좋은 상품을 싸게 팜으로써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근로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생산성과 관계없이 무리한 임금 인상과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노조는 독점 재벌 못지 않게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보장하겠다”고 밝힌 일이 있다. 립 서비스라는 관측도 있지만 반공주의자 닉슨이 중국과 수교했듯이 오히려 친 노조 성향의 정치인이 노조 개혁을 이룰 수 있을 수도 있다.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 조짐을 보이고 곳곳에서 전운이 나날이 짙어 가는 상황 속에서 노무현 정부가 과연 한국을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세울 진정한 경제 개혁을 해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민 경 훈 <편집위원>
kyu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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