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LA타임스 1면에 한 요리사의 자살을 다룬 기사가 크게 실렸다. 프랑스의 유명 요리사 베르나르 라조(52)가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의 평점이 최고점수인 19점에서 17점으로 떨어진 것을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그 기사의 내용이다. LA타임스뿐 아니라 뉴욕타임스, CNN 등 주요 언론이 한결같이 이 사건을 비중 있게 취급한 것으로 보아 ‘평점 2점’ 하락에 엽총 자살을 선택한 요리사의 극단적 반응이 이들이 눈에는 상당히 기이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외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솜씨 좋은 요리사를 예술가로 대접하는 프랑스에서 라조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베르나르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독창적인 맛에 흠뻑 취한 프랑소아 미테랑 대통령은 그에게 뢰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고, 그가 운영하는 ‘라 코드 도르’ 식당은 요식업소로서는 최초로 파리의 증권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고단한 무명시절을 거쳐 프랑스를 대표하는 특급 요리사로 자리를 잡은 이후 그는 심한 강박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까탈스럽고 변덕스런 비평가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늘 전전긍긍했고, 식당의 최고 등급을 유지하기 위한 무리한 시설투자로 막대한 빚까지 짊어지게 됐다. 이같은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식당 평점이 떨어지자 베르나르는 아내와 세 자녀를 뒤에 남겨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베르나르의 비극은 프랑스의 신문 ‘르 파리지앵’의 지적대로 특급 요식업체들 사이의 살인적인 과열 경쟁과, 이를 최대한 부추켜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비평가들의 노회한 계산속이 한데 맞물려 빚어낸 결과이다. 하지만 좀더 근원적 문제는 타인의 평가와 명성에 대한 베르나르의 병적인 집착이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예술가로 입신한 그는 자신이 잘하고, 또 즐겨하는 일을 일생의 업으로 삼는 드믄 축복을 받았지만, ‘정상’을 지켜야 한다는 집착과 강박감을 털어내지 못한 채 그 무게에 짓눌려 압사하고 말았다. 장인의 자존심으로 포장된, 명성에 대한 집착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인이었다.
돈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일단 손에 쥔 것을 잃지 않으려는 욕심은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과욕과 집착은 늘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집착과 과욕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수단’을 반드시 달성해야할 ‘목적’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총력 전진만이 미덕인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게 모르게 경주마의 습성을 몸에 익힌 사람들은 어느결엔가 가치가 전도되는 ‘허위의식’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허위 의식이 판치는 집단에서 판단의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더 많이, 더 빨리”이다. 남보다 단 하나라도 더 손에 움켜쥐고, 남보다 단 한걸음이라도 앞서는게 최상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칙’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가톨릭 교리반에 입교한 예비신자들은 간단한 시험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한 허위의식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를 갖는다.
입교 첫 날. 예비신자들은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한다. 이름, 나이, 가족관계, 직업 등을 밝히는 순서다. 두 번째 모임에서 교리반 담당자는 앞뒤면이 문제들로 빼곡히 채워진 시험지를 예비신자들에게 나눠준다. 문항수에 비해 턱도 없이 짧은 제한시간을 제시한 담당자는 예비신자들에게 “지시사항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답안작성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1번 문제부터 마지막 문제까지 빠짐없이 읽으라”는 희한한 요구를 곁들인다.
물론 지시대로 문제를 다 읽는다면 제한시간은 거의 날라가게 된다. 잠시후 교실안은 연필을 놀리는 소리로 가득찬다. 그러나 제한시간이 끝나 담당자가 시험지를 거둬갈 때까지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시험지 뒷면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숨어 있는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읽지 못한다. “이름만 쓰고 시험문제의 답안은 절대 작성하지 마십시오.” 경주마들은 도처에 있다.
이강규 <국제부 부장>
kangk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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