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기득권층이 타기(唾棄)의 대상이 된 적도 드문 것 같다. 배에만 기름이 낀게 아니다. 머리 속도 기름이 꽉 차 있다. 자기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있다. 기득권층 하면 떠오르는 인간형이다. 보수 정도가 아니다. 수구에, 반동이다. 하여튼 공격 받아야 마땅한 존재다. 개혁이 안된다. 정치가 그 모양 그 꼴이다.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다. 이 모든 건 전적으로 그들 탓이다. 이게 일반화 된 한국적 논리인 모양이다.
기득권층은 영어로 이스태블리시먼트(The Establishment)다. 간단한 사전적 정의로는 사회의 지배계층을 뜻한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국가내 주요 제도의 상층부를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사회적 혜택을 더 많이 누리고 있다.
기득권층 하면 미국에서는 한 때 대기업과 연관져 생각됐었다. 이 ‘기득권층=대기업’의 등식이 상당 부문 깨져나간 게 대공황 때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그 당시로는 꽤 진보적인 정치연합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기득권층은 근저에서 부터 변화를 맞게 된 결과다.
이른바 ‘루즈벨트 코울리션’이 그 정치연합 세력이다. 이후 이 정치연합은 미국의 기득권층을 이야기할 때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 새로운 기득권층이 중심 축이 돼 미국 사회는 잇단 국난의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 이다.
그들은 대공황을 이겨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전후 ‘미국의 세기’를 열었다. 그 새 기득권층의 대부격 인물들이 ‘6명의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딘 애치슨, 애버럴 해리먼, 로버트 라빗, 찰스 볼른, 존 제이 맥클로이, 그리고 조지 케난 등.
수년전 톰 브로커가 써 내 베스트 셀러가 된 가장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도 이들의 세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전 세대 기득권층이 보여준 불굴의 용기와 조국애 모음집이 바로 ‘가장 위대한 세대’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유일의 초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전 세대 기득권층의 깊은 통찰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소련 봉쇄정책을 도입했다. 이 전략은 주효해 소련제국은 결국 붕괴됐다.
‘가장 위대한 세대’는 말하자면 딘 애치슨, 조지 케난 등으로 대표되는 전 세대 기득권층에 대한 요즘 세대의 헌사(獻詞)다. 베이비 붐 세대가 바로 요즘 세대로, 이들은 물질적 풍요속에 살아왔다. 월남전 세대이고 반전 세대다. 동시에 불신의 세대이기도 하다.
자기 중심적으로만 살아온 베이비 붐 세대가 철이 들면서, 또 역사라는 퍼스펙티브를 통해 아버지 세대를 다시 보았을 때 그 위대성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는 위대한 미국의 전통을 물려준 전 세대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요즘에는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루즈벨트 코울리션’을 축으로 형성돼 계승되어온 미국의 기득권층이 구조적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9.11 사태후 국제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고 이에 따른 미국의 전략이 ‘전쟁억지’ ‘봉쇄’에서 ‘선제공격’으로 그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면서 나오는 말이다.
이는 물론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다. 이라크 전쟁은 벌어지지도 않았다. 한반도의 핵위기도 해소되지 않았다. 까딱하면 모든게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새 전략이 주효해 새로운 국제질서가 확립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조지 W 부시,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 콜린 파월, 폴 월포위츠 등이 새로 형성되는 기득권층의 축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기득권층은 미국에서는 타기의 대상이 아니다. 미국의 프라이드다. 이유는 그들의 혜안 때문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제 때문이다. 그들은 남다른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 그치는 게 아니다. 깊은 통찰력과 함께 높은 도덕성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한국과 너무 대조돼서다. 그리고 기득권층이 존경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게다가 이런 의문도 떠올라서다.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붙어다니는 본래 의미의 기득권층이라는 게 한국에 도대체 존재하기는 했는가”하는 의문이다.
그건 그렇고, 뭔가 기류가 심상치 않다. 보수가 하나로 뭉쳤다.
그에 맞서는 진보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3월1일을 기해 보수진영은 반핵반김(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를 열고, 진보진영은 북측인사 100명을 초청해 평화통일 3.1 민족대회를 연다니 하는 말이다. 어딘가 해방직후의 모습을 닮았다. DJ 정권의 유산인가, 아니면 새 시대를 알리는 전조인가. 상당히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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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세 철 <논설실장>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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