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은 누구시오?”
50대 후반으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의심에 차고 적의가 묻어 났다.
나는 우선 전화선 너머의 음습한 분위기가 무서웠고, 그보다도 혹시라도 이런 ‘수상한’ 전화가 그 여자를 고통스럽게 만들까봐 두려워서 적당한 말을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몇 년 전 한 여성의 글을 팩스로 받았다. 글을 보낸 사람의 이름과 거주지는 두 개씩 쓰여 있었다. 실제 이름과 거주지 옆에 전화번화가 있었고, 신문에 글을 실을 경우 기입할 가명과 가짜 거주지가 또 적혀 있었다. “20년간 남편만 들어오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워 떨던”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글이었다.
“남편을 경찰에 신고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고 또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참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신고를 못하였다”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신 그가 매를 맞을 때마다 이웃집에서 여러 차례 신고를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나서서 무마를 했고, 옆집 미국할머니가 “그건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다”며 법에 호소할 것을 충고했지만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보복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이 주기적으로 이유 없이 구둣발로 차고, 주먹으로 피멍이 들도록 때리며, 머리카락이 뽑히는 등의 육체적 폭력, 인간으로 참기 힘든 모욕적인 언어폭력을 고스란히 다 받아냈고, 때로 “마음속에서 남편에 대한 살의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라”면서 오랜 세월을 지옥처럼, 악몽처럼, 짐승처럼 살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용기를 내서 글을 쓴 것은 자식이 자라 대학생이 되어 “아버지가 살인자가 되고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경찰에 신고를 한 덕분이었다. 남편이 상담과 교육을 받고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그는 기뻐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처음에 손찌검을 시작할 때 단호하게 대처해서 습관성이 되지 않도록 하라”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혼자서 고통 당하지 말고 법에 호소해 도움을 받으라”는 당부로 글을 끝맺었다.
그후 몇차례 나는 그 여성과 전화통화를 했다. 글에서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만에 하나라도 남편이 알면 큰일 난다”고 불안해하며 조심조심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남편이 전화를 받은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 여성과 다시 통화를 하지 못했다.
유명 개그우먼이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해 입원하면서 한국에서 가정폭력을 주제로 한 논쟁이 뜨겁다. 서울의 어느 부부는 이번 사건을 보는 의견 차이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뜬 반응을 보면 소위 ‘가정사’에 대한 의견은 족히 100년의 세월을 넘나들 만큼 사고방식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이 아득하다. 개그우먼 남편의 폭행을 가장 앞장서서 비난하는 측은 대개 자라면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었다.
아버지의 무서운 폭력 앞에서 온 가족이 벌벌 떨며 살았다는 30세의 한 여성은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중상층의 가정으로 겉으로 보면 남부러울 것 없지만 가족 모두 “속은 멍들대로 멍든 사이코들이다”고 했다.
“어머니는 참는 것밖에 모르는 바보 사이코, 자식들은 밤마다 아버지를 죽이는 또는 죽임을 당하는 꿈을 꾸는 사이코들이지요”
그 정 반대편의 입장은 ‘여자가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40대 초반이라는 한 남성은 “아내가 바람 피다 들키거나 바깥일에 빠져서 가정을 소홀히 하면 남편이 폭력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남편을 얼마나 화나게 만들었으면 야구방망이로 때렸겠느냐”고 때린 남성을 옹호했다.
폭력을 쓴다는 것은 약자를 힘으로 누름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려는 행위이다. 그런 확인 없이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상태, 다시 말하면 열등감이 그 밑바닥에 있다. 거기에 ‘남편은 하늘이어야 한다’는 남존여비의 강박관념, 분노를 통제 못하는 불같은 기질이 합쳐지면 가장 만만한 가족들을 희생 양으로 삼게 되는 것 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맞다. 부부가 너무 싸우지 않아도 문제가 있다. 단 부부가 모두 정신적으로 건강한 경우에 한한다. 배우자중 한사람이 정신질환자일 경우 그래서 이성을 잃고 이유 없는 폭행을 일삼는 경우, 그것은 더 이상 부부간의 싸움이 아니다. 더 심한 범죄로 커 가는 폭력일 뿐이다. 법이 개입해야 할 문제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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