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슴이 조여들어 숨을 쉴수가 없고, 몸은 탈진한 듯 기운이 하나도 없고, 세상은 온통 잿빛. 그런데 한순간에 그 모두가 바뀐다. 아마도 전화벨이 울렸을 것이다.
『비로소 웃을 수 있고 한가롭게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비가 와도 비가 와도 비를 맞을 수 있고 서점에 들러도 마음이 가벼울 수 있고 책들이 한없이 맑아지는 걸 볼수 있게 된 건 …모두 어제 네가 있는 곳으로 오라 고 말했기 때문이야 네가 있는 곳! 따뜻한 곳! 그곳으로 오라고!』(이승훈의 ‘사랑’)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던 삶이 갑자기 생기를 찾고, 푸른 하늘, 날아가는 새들, 야생의 풀들이 난생 처음 본 듯 싱그럽기 만한 경험 - 사랑이다.
사랑은 가없는 달콤함으로 찾아들지만 목타는 그리움과 욕심을 동반하고, 애욕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부처는 “연정에서 근심이 생기는 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가르쳤다. 그런 가르침을 만해 한용운도 들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한용운의 ‘선사의 설법’중 에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아프면서도 감미로운 사랑의 줄에 묶이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객관적으로 훨씬 조건이 나은 사람들 대신 하필 ‘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면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사람들이 평생을 사랑하며 살고, 이상적인 한 쌍이 될 것같은 남녀는 서로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의 남편·아내를 바라보면서 “내가 뭐 때문에 그때는 저 사람 없으면 당장 죽을 것만 같았을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는 ‘사랑의 법칙’을 그리스 로마인들은 ‘큐피드의 화살’로 설명했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화살처럼 사랑은 예측불허이자 불가해하고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고대인들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불교는 전생, 현생, 후생에 걸친 삼생연분으로 부부의 인연을 설명한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끈질긴 인연의 줄이 부부를 묶고 있다는 말이다.
‘화살’이나 ‘인연’보다는 과학적이고 싶어하는 현대 심리학은 ‘사랑의 지도’를 내세운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타입은 무의식중에 뇌속에 입력이 되어 있어서 지도를 들고 목적지를 찾아가듯 사랑의 바로 그 상대를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지도’안에는 좋아하는 외모, 목소리, 체취, 체격, 성격등이 모두 입력되어 있는데 대개 유년기에 모두 작성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8살쯤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뇌 속에 장차 사랑에 빠질 상대의 윤곽을 대충 잡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지도’는 무엇을 근거로 그려지는 것일까. 심리상담 칼럼니스트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조이스 브라더스 박사는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에게 이상형을 물어보면 외모나 성격의 특징이 대개 자신의 어머니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우리 생애 최초의 사랑의 대상, 바로 어머니가 남녀를 불문하고 ‘사랑의 지도’의 상당 부분을 그리는 당사자라는 이론이다. 어머니가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으면 장차 어른이 되어서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고, 어머니가 강인하고 절제력이 강한 여성이었으면 그 아들이나 딸은 비슷한 특징의 이성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랑의 축제일, 밸런타인스 데이가 또 돌아왔다. 꽃과 멋진 외식을 기대하는 아내와 도무지 무신경한 남편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집도 꽤 될 것이다. 남들 다 하듯 꽃이나 외식으로 이 날을 기념할 필요는 없지만 한가지 기억할 것은 있다고 본다.
그것이 ‘화살’이었건, ‘인연의 줄’이었건, ‘지도’였건 그가 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은 보통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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