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카 유니스의 결혼식은 요즈음엔 별로 사용되지 않아 내 기억에서도 사라질 뻔한 ‘혼례식’이란 용어로 부르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하순 보스턴의 코플리 스퀘어 가든에서 치른 그녀의 결혼식을 굳이 혼례식이란 고색창연한 말로 부르고 싶은 이유가 바로 이 글의 주제가 될 것 같다.
30대 중반을 넘긴 커리어 우먼인 능력 있는 그녀가 두 살 연하의 백인 남성과 장래를 약속한 이후 1년간의 준비 끝에 치르는 예식이니만치 청첩장, 호텔 예약, 리허설, 피로연 등 모든 절차에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결혼식이었는데 우리 세대가 그 나이에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스타일의 예식이었다.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 탓도 있지만 요즈음 유행인 것 같은 흰 텐트 안에 꾸며진 식장으로 들어서는 신부의 의상은 한국 영화나 의상 쇼에서 보았음직한 대례복이었다. 신랑 역시 색깔 고운 한복 차림에 옥색 대님을 의젓이 매고 있었다. 들러리인 그녀의 동생 레슬리도 붉은 댕기를 넣어 땋아 내린 머리에 붉은 치마, 노란 저고리의 춘향이 차림이었다.
미국의 전통과 문화를 대표하는 도시, 유서 깊은 보스턴 시의 한 가운데서 가족과 일가친척을 제외하고는 백퍼센트가 미국인들인 하객들 앞에서 조선시대 의상의 신부와 들러리 그리고 자신의 한복 차림과 색시의 대례복이 너무 자랑스러워 줄곧 희색이 만면한 미국인 신랑의 모습은 나에게 뿌듯한 자긍심과 더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였다.
“We have come a long way” 이중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젊은 2세 한인 목사가 집례한 이 혼례의 클라이맥스는 폐백순서였다. 새색시의 열두폭 다홍치마 자락에 탐스런 대추와 밤알을 한 알이라도 더 많이 던져 넣으려고 한껏 애쓰는 시어머니와 시댁 가족들의 엄숙하고도 열정적인 포즈에는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 앞에 잔잔한 미소와 빛나는 눈빛으로 서있는 신부의 얼굴 위로 나의 기억은 27년 전 어느 날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유니스가 처음 이민 온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리라. 남동생과 오늘 들러리를 선 여동생과 함께 낯선 미국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학교에 간 첫날, 집에 돌아간다고 떼쓰며 우는 여동생과 석고처럼 굳은 얼굴의 남동생 곁에서 누나 노릇, 언니 체면을 세우려고 겁먹은 표정을 감춘 채 억지미소를 커다랗게 짓고 비둘기 눈빛을 반짝이며 서 있던 그 꼬맹이가 어느덧 이렇게 훌륭하게 장성하여 시집을 가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감회가 교차하고 있었다.
들러리의 한복 맵시를 지극히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한다는 그녀의 보이프렌드의 표정에서도 그들이 장차 결혼한다면 당연히 한복 예식을 선호하리라는 기대가 역력하였다. 들러리의 한복이라야 그녀의 어머니인 나의 올케가 젊었을 때 입었던 아주 구식 의상이었다. 한복을 새로 맞추어 주었는데도 굳이 때깔 바랜 그 옛날 옷이 마음에 든다며 입었다는 올케의 설명이었다.
혼례식이 끝나고 역사 유물로 지정된 그 곳 건물 안에서 칵테일 타임을 가진 후 바로 옆 텐트 안에 마련된 피로연은 밴드음악과 정선된 메뉴 등 모두가 손색이 없어 이례적인 혼례식의 끝맺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디너도 양식과 한식을 섞어 네 차례에 걸쳐 제공되었는데 음식 맛과 모양이 뛰어나다고 하객들은 원더풀을 연발하였다. 턱시도를 그럴듯하게 차려 입은 아빠와 긴 비취색 비녀, 찬란한 대례복의 신부가 흥겨운 생음악에 맞춰 함께 추는 볼륨댄스는 아주 어울리는 멋진 장면이었다.
이제 이 땅의 우리 2세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 문화와 미국 예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자신들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해 가는 그들의 긍지와 자신감에 우리 1세대는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면서 더 많은 한국의 전통과 한국 고유의 문화가 곳곳에 접합되어 꽃을 피우리라는 믿음이 확인되는 나의 조카 유니스의 혼례식이었다.
조영연
약 력
▲ 미네소타 대학원 졸업
▲ 한국수필 신인상
▲ 미주 한국일보(중부판) 칼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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