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의 달 1월도 지나고 2월1일은 우리의 ‘설’, 4일은 ‘입춘’, 15일은 ‘정월 대보름’, 19일은 ‘우수’이다. 모국에서는 설을 계기로 귀성 또는 역귀성을 위해 2,000만의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Happy new year! 오늘이 Chinese new year지요.” 이렇게 말하는 미국인에게 고맙다고 답례하고 오늘은 Chinese new year가 아니고 Lunar new year라고 정정해 주면 제대로 배운 외국인들은 금방 동의하고 미안해한다. 꼭 정정해 주어야 할 이유는 우리의 ‘설’은 음력설이지 중국의 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은 신라시대 이후 신일(愼日)이라 하여 ‘자성의 날’로 여기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 다음 어른에게 세배를 올리고 덕담을 듣는 날이다. 설빔으로 부모님이 사주신 삼천리표 운동화를 머리맡에 놓고 잠이 들던 섣달 그믐의 늦밤, 아랫목에 자리를 잡은 할머니는 두툼하게 바지저고리에 솜을 펴시고 인두질을 하신다. 어머니는 밤새도록 가래떡을 써시고, 재가 소복이 쌓인 청동 화로에는 밤이 묻혀 소리를 내며 튄다. 여기 1세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어릴 때 추억이다.
이런 낭만과 이제 역사 속에 묻혀 고담으로 남게 되었다. 설빔은 사서 입힌다. 아이들은 설빔에 서린 어머니의 정성을 못 느낀다. 아니 설빔이란 말도 모른다. 단오, 유두, 칠석, 한가위, 상달 등도 어색한 단어다.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온기도 멋도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미국서 태어나 중국을 한번도 가본 일이 없다는 10세 중국 꼬마가 중국인이 지키는 설을 비롯한 연중 명절의 유래와 그 날 먹는 음식들을 설명해 주눅이 들었다는 어느 취재기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역사학자 ‘그레이 톰슨’에 따르면 이민생활에서 자녀들에게 전통과 뿌리 의식을 효과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모국의 명절을 알고 지키는 일, 둘째 모국어를 가르치고 서로 대화하는 일, 셋째 모국어로 된 신문을 읽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풍속과 전통 그리고 예절 지키기에 가장 전형적인 나라는 중국에 이어 영국이다. 가장 공통적이어야 할 자동차 운전석의 위치가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 그 예의 하나이다. 옛날 마차시절, 마부가 오른쪽에 앉아 오른 손으로 채찍을 휘둘러야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 불편이 없다는 전통이 자동차 운전석으로 비약한 것이다.
풍속과 전통에 관한 여론조사(멤피스 한인사회)에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건 남의 것이건 미풍양속인 이상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9명(89%), 남의 풍속보다는 우리의 전통과 예절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8명(80.3%)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감수성이 강한 우리의 후예들은 우리의 전통과 예절을 배울 겨를도 없이 설익은 이곳 풍속에 젖어 들고 있다. 이같은 추세는 본국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 20여가지나 된다는 무지개 두발 염색이 그렇고 보란 듯 난무하고 있는 휴대폰의 횡포가 그렇다.
전통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지붕 위의 바이얼린’(Fiddler on the Roof)이란 작품이 있다. 세대 차이로 딸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사랑을 찾아 떠나는 세 딸을 보내놓고 주인공 토브예가 한 말은 ‘전통은 바뀔 수는 있어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제가 우리의 설과 성과 이름 등 전통을 말살하려고 강압수단을 썼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설은 음력설이 설답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통은 농목사회가 도시사회로 바뀌면서 또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통합되면서 퓨전 현상이 일어나 바뀔 수는 있어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전통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라”고 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 1세들이 해야 할 몫은 올바른 가치관을 그들에게 갖게 하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슬기로운 우리의 전통과 예절 그리고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일이다.
장익환/ 멤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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