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은 어느 쪽이 더 해볼만한 자리일까. 겉으로 보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최고 책임자인 미국 대통령이 더 나을 것 같지만 실속은 한반도 반 토막에서만 말발이 먹히는 한국 대통령이 더 있다.
청와대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요새는 조금 달라졌다지만) 한국 대통령과는 달리 미국 대통령은 예산과 고위직 지명 등 국내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외교와 국방 문제도 항상 의회와 국민 정서, 해외 여론에 신경을 써야 한다.
미국은 여론 정치의 나라고 3권 분립의 나라다. 대통령이 의회나 국민을 무시하려 했다가는 당장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했다가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정한 헌법을 위배했다고 탄핵 당할 수도 있다.
두 나라 대통령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판다’(sell)는 단어다. 한국 대통령의 행위를 묘사하면서 ‘판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없다. 오로지 각 부처를 돌며 ‘훈시’하거나 관계자들을 불러 ‘지시’할 뿐이다. 반면 미국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늘 이 단어가 붙어 다닌다. 어떻게 세금 감면안을 의회에 ‘팔’ 것인가, 이라크 공격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파는’ 것이 숙제다 등등.
여기서 ‘판다’는 물론 ‘설득한다’는 의미다. 설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내 의견은 모두 옳고 너는 모두 그르다’, ‘네 깐 놈이 알긴 뭘 아느냐’라는 사고 방식이 밑에 깔려 가지고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같은 미국식 정치 행태가 영국으로부터의 오랜 민주 전통에 힘입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더 깊이 캐보면 민주주의 자체가 상업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17세기 네덜란드, 근대 영국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꽃핀 곳은 예외 없이 상업이 발달하고 상인들이 힘을 가진 시기였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다. ‘내 물건 안 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가게 주인과 거래를 하려는 손님은 없다. 상행위와 민주주의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상공업이 발달한 나라가 거의 틀림없이 민주주의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화도 산업화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6개월 간 실시해 온 경제 개혁의 실패로 북한이 완전 파탄 상태라는 소식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27일 가격 자유화와 임금 인상을 골자로 한 개혁안 시행 이후 지난 석 달 사이 쌀값은 50%에서 300% 올랐으나 공장에서는 돈이 없어 근로자들에게 오른 임금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농부들도 쌀값이 오른 만큼 비료와 원자재 값이 올라 개혁의 덕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국제 사회의 식량지원도 줄어 노약자와 임산부, 아동들까지 밥을 굶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위대한 지도자’의 ‘교시’로 이뤄지는 북한은 지구상에서 장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나라다. 50년에 걸친 ‘자본주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탄압으로 일반주민들은 상행위의 개념까지 가물가물한 상태다. 그런 나라에서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루아침에 날벼락 같은 경제 개혁을 시도했으니 잘 될 리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신의주 경제 특구 초대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탈세 및 사기죄로 체포되고 일본으로부터 돈 좀 받아내려고 일본인 납북 사실을 시인했다가 “납치해 간 사람 더 내 놓으라”는 역풍에 부딪쳐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 핵 위기를 일으켜 체제 보장과 경제 원조를 받아내지 않으면 안되게 된 처지도 이해는 간다.
모택동 집권 이전까지 오랜 상업주의 전통이 있던 중국도 1979년 등소평이 처음 개혁을 시작했을 때는 조심스럽게 했다. 창고는 빈털터리고 국제 신용도는 최악인 북한이 법적, 사회적으로 시장 경제에 대한 아무런 이해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김정일의 말 한마디로 경제를 살리려 했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
“독재정권은 개혁하려 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국민은 다스리기 쉽지만 한 때 희망을 가졌다 환멸을 느낀 국민은 통제하기 힘들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어들면서 북한 주민들도 바깥 세계의 실상에 서서히 눈뜨고 있다. 지금 평양에서 만주의 삭풍에 등이 시린 사람은 짓밟히고 짓밟혀 온 민초만은 아닐 것 같다.
민 경 훈 <편집위원>
kyu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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