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이란 참으로 귀하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전생 500년의 인연이 있다고 한다.
<인연>이란 수필집을 낸 피천득 교수는 자신이 어렸을 때 어느 소녀와의 인연을 잔잔히 그의 책에서 풀어 나간다. 그것은 그가 열 일곱 살 되던 해 동경에 가 묵고 있던 집 딸과의 인연을 그린 것이다.
아사꼬(朝子)란 이름으로 불렸던 소녀는 그를 오빠처럼 따랐다 한다. 그는 동경을 떠날 때 아사꼬에게 작은 손수건과 아사꼬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받았다. 그는 그후 십여 년이 지난 후 두 번째 동경에 갔을 때 다시 아사꼬를 만난다. 아사꼬는 대학 삼 학년이 되어 있었다. 둘은 문학 이야기를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이별한다.
그후 그는 또 십여 년이 지난 해방이 된 다음, 한국전쟁이 있고 정전이 된 1954년 다시 동경에 들를 일이 있어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아사꼬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하는 일본인 2세 미군과 결혼 한 후였다.
아사꼬의 어머니는 그를 아사꼬의 집으로 안내한다. 그는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꼬의 얼굴이었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글엔 "그(아사꼬)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 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인연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게 하는 매력(魅力)과 마력(魔力)을 갖고 있다. 그 만남이 어떻든,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만나려 해도 만나질 수가 없다. 만남을 통해 사람은 변화를 가져온다. 만남이 없으면 없는 데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피천득 교수가 말한 것처럼 그리워하는 데도 못 만나는 사람은 있다.
시인들은 그리움을 시로 승화시킨다. 음악가는 그리움을 오선지에 그려 넣는다. 화가는 그리움을 색깔로 승화시킨다. 그리움에는 혼이 담겨져 있다. 혼이 담겨있지 않은 그리움은 그리움이라 할 수 없을 게다. 그런 그리움에 인연이 가미될 때 만남은 다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래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은 그리움을 낳게 한다. 피천득 교수가 아사꼬와의 마지막 만남을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인연으로 표현한 것은 그리움이 사라져버린 결과를 그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1879년에 태어나 1944년에 입적한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님의 침묵>의 저자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인연설’이란 사랑의 시를 남겼다.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할 수 없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
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인연설 전문) 만해 스님이 사랑한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나타낸 ‘인연설’에는 다분히 인연을 통한 ‘만남’과 ‘그리움’이 강조되고 있다.
인연은 불교 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연기설(緣起說)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연기(緣起)란 ‘인(因)’이란 원인과 ‘연(緣)’이란 결과에 따라 사상(事象)이 생긴다고 보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줄인 말이다. 즉, 사람이 늙고 죽어가는 것은 태어남이 원인이다. 또 연기설에서의 괴로움은 사랑으로 인한 번뇌나 무지(無知) 혹은 무명(無明)에 의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어지면 고통도 없어진다. 곧 사랑이 없으면 번뇌도 없고 번뇌가 없으면 고통도 없다란 얘기다. 연기설에 따르면 만남이 없으면 헤어짐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사(人間事) 모두는 인연을 통해 생겨나고 없어진다. 일상사를 통해 고리로 연결되어지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함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500년의 인연이 있다 한다.
김명욱 <종교전문기자.목회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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