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운전석에는 계기판이 있다. 차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브레이크, 안전벨트, 배터리, 오일, 문 개폐여부, 엔진 등을 알려주는 경고등이 있다.
브레이크에 불이 들어오면 브레이크를 새 것으로 바꾸든지, 비탈길에 주차하느라 걸어 놓았던 잠금 장치를 풀면 된다. 안전벨트등이 빨개지면 누군가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것이므로 금방 바로잡을 수 있다. 차 문이 제대로 잠겨 있지 않다는 사인이 나오면 문을 다시 한번 여닫으면 그만이다. 배터리나 오일등이 켜져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계기판의 ‘엔진’에 불이 켜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다수 운전자들이 경험했겠지만 로컬에서든 프리웨이에서든 엔진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대개 차를 세우게 된다. 겁 없이 그냥 달렸다가 무슨 낭패를 볼지 모르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자동차의 심장’에 경고등이 들어왔으니 여유부릴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른 부위처럼 문제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야말로 비상이다.
엔진 경고등이 운전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정확한 원인과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걱정만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에서다. 어떻게 무엇을 체크해야 하는지 안개 속에서 마음만 졸이게 된다. 그런데 엔진 경고등이 커졌다가 꺼지는 상황을 한 두 번 경험한 사람은 점차 무신경해지기도 한다. 배기 시스템 고장으로 불이 켜질 수도 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어떤 운전자들은 아예 보기 싫은 엔진 경고등을 검정 테입으로 덮어버린다고 한다. 엔진 경고등을 보다 구체적인 시그널로 바꾸려 해도 경비가 많이 들어 현실성이 없다는 게 제작사의 설명이다. 그러니 진짜 심각한 문제 때문에 엔진 경고등이 들어왔는데도 운전자들이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도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비슷하다. 위험은 도처에 있고 문제는 산적해 있다. 물가가 오르면 금리를 높이고, 불황 땐 금리를 내려 경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 정부재정이 부족하면 인심을 잃더라도 재정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리면 된다.
범죄와 마약이 창궐하면 단속과 처벌을 강화해 그 수위를 낮출 수 있다. 인종차별로 사회 구성원간에 불화가 심해지면 차별금지법과 화합책을 강구해 볼 수 있다. 테러는 관련조직의 동태파악, 자금줄 차단, 철두철미한 검색으로 맞설 수 있다. 이들 조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안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은 가능하다. 설득력이 있으니 거의 모든 국민이 뒤를 밀어줄 수 있다.
미국의 대 이라크 공격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국민들이 이에 보조를 맞추고 있지는 않다. 부시 행정부를 위시해 공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안위와 세계평화를 명분으로 걸고 있지만 ‘이라크 경고등’에 많은 사람들이 갸우뚱해 하고 있다.
경고등은 들어왔는데 이 불이 왜 커졌으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후세인이 ‘독재자’이고 ‘위험 인물’이란 점엔 공감하더라도 그것이 남의 나라에 대한 무력행사를 합리화하기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수만 명의 미국인이 지난 주말 섭씨 영하 7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워싱턴 DC 의사당 앞에서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평화시위를 벌였다. 부시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위험하다며 경고등을 켜고 무력해결을 고집하고 있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꼭 엄청난 피를 봐야만 하는지 의아해 한다.
부시 행정부가 국제 사찰단을 다그치는 것도 석연치 않다. 애당초 유엔사찰에 동의했으면 못마땅해도 이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적절한 시간을 주는 게 도리다. 유엔안보리 이사국인 프랑스, 중국, 러시아, 독일이 충분한 사찰을 지지하는 가운데 ‘공격’ 못해서 안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초강대국답지 않다. 이라크 사태를 마무리하면 더 이상 국제 공조를 취할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엔진 경고등이 운전자를 불안케 하듯 부시의 ‘이라크 경고등’이 근심을 양산하고 있다. 납득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유혈해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엔진 경고등을 검정 테입으로 가린 운전자처럼, 부시의 과잉대응으로 인해 ‘경고등’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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