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비한 식당…돈 되는 서당
도(道) 잃은 도인촌’청학동(靑鶴洞). 뭇 선인들이 비결과 문집에서 이상향으로 그렸던 곳.
그래서 오랜 세월, 어쩌면 아직도 많은 이에게 그 이름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곳이다. 삭막한 상위 행정단위를 붙여 부르는 것조차 조심스럽지만, 굳이 따지자면 경남 하동군 청암면 청학동.
하지만 16일 청학동에서 만난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도인촌(道人村) 한 복판에서 도인촌이 어디냐며 길을 잃고 서 있었다.
■ 구름 위에 선 자본의 위력
진주와 하동을 잇는 국도 2호선이 지방도 1003호선과 만나는 청암면 횡천리가 청학동 입구다.
거기서부터 지리산 삼선봉 아래 청학동 본동까지는 골을 따라 50리 길. 굽이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풍광은 예사롭지 않지만, 골마다 자리잡은 관광농원과 ‘욕실 완비’ 숙박업소, 토종 닭임을 강변하는 옷닭집들, 찜질방을 겸한 ‘수련원’ 등은 여느 시골 관광촌과 다르지 않았다.
미심쩍음을 누르고 달리다 보면 ‘청학’의 상품성을 대변하듯 간판마다 ‘청학동’을 접두사처럼 매단 마을이 나타난다.
청학동과 한 동네로 통하는 학동마을이다. 단체예약 전화번호가 병기된 ‘노래마당’ 간판이 걸렸고, 대통와인숙성 삼겹살 집까지 섰다. 산만한 서당과 식당 간판들을 지나 도인촌 본동 마을에 들어서서도 관광객을 맞이한 것은 식당과 민박집, 토산품 매장.
정작 주인공인, 이제는 8채만 남은, 산죽지붕 전통 초가는 뒷방 늙은이처럼 밀려 나 앉아 뜨내기의 선심(仙心)을 자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댕기머리 총각도 상투 틀고 유건 쓴 도인도 만나기 어려웠다.
“‘상투’ 볼라모 서당에 다 있싱께 거그나 가보소.” 가던 길에 만난 단체 관광객들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볼 거 하나 없다”며 불평을 연발하고 있었다.
■ 번성일로 서당촌의 명암
“부생아신(父生我身) 하시고….” 아이들의 성독(聲讀) 소리를 좇아 찾아 간 한 서당에서는 ‘사자소학(四字小學)’ 마무리 수업이 한창이었다.
2주 프로그램(수강료 30만원)에 수강생은 약 120명. 대개 서울 등 도회지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온 아이들로 내주에는 또 그 정도의 아이들이 2차 입소할 예정이라고 했다.
남원에서 한학을 익혀 3년 전에 ‘청학동(사실은 횡천리)’에 들어왔다는 훈장은 다른 서당과는 차별적인, 독창적인 인성ㆍ예절 교육프로그램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하동군청에 집계된 서당은 모두 21곳(연수원 2곳 포함), 지난 여름방학에만 1만158명의 초ㆍ중등학생들이 청학골을 거쳐갔다.
음식점 주인의 말처럼 ‘돈’이 되니, 서당 글 배운 주민이라면 대개 서당을 차리거나 고용 훈장으로 나서고 있고, 외지로 이주했던 주민이나 낯선 외지인들도 찾아드는 추세다.
청학동 이장 김하용(40)씨는 “마을도 10여년 전 30여 가구에서 최근 60가구로 2배 가량 커졌다”고 했다.
현행법상 서당에 대해서는 설립ㆍ운영에 아무런 규제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질 없는 훈장도 더러 있고, 심지어 관광업자가 운영하는 서당까지 난립하는 실정.
2대째 서당을 운영하고 있는 한 훈장은 “솔직히 우리도 사업이고, 거기도 사업인데 하라 말라 할 수 있심니까”라고 했다.
대다수 서당이 ‘청학동 서당’으로 통하는 실정이다 보니 교육 부실 시비가 붙거나 사소한 사고라도 나면 함께 욕 먹기 일쑤다.
“고학년이나 중학생 중에는 말썽 피우는 아이들이 더 많십니다. 숨어서 담배 무는 녀석도 있고, 동생들 때리거나 한 반 친구와 더러 싸우기도 합니다.” 그는 그래도 자기 서당은 관리감독이 워낙 철저해서 탈 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 타락? 오해가 빚은 촌극?
청학동 주민들이 터를 잡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유교와 불교 도교의 장점을 융화해 약 100년 전에 창시된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定儒道)’ 교인들이 주축이었다.
마을 진입로가 확ㆍ포장(80년)되기 전에는 50리가 꼬불꼬불 지겟길이었다. 그래서 마치 청학동이 물질문명을 배척하고 전통을 고집하는 은자(隱者)의 마을처럼 알려졌지만 그건 ‘신문이 만든 말’이라고 했다.
“전화만 해도 옛날에야 돈도 없고, 필요도 없어서 못 놓은 거 뿐입니다. 우리가 무쏘 타고 휴대폰 쓰는 거 보고 변했다 쿠는데 기가 맥힙니다.”
또 한 주민은 “댕기머리 없다꼬 투덜대고, 볼 것이 있니 없니 캐샀는데 누가 오라 캣십니까, 입장료를 받았십니까. 상투 틀고 비 새는 초가지붕에 살믄서 구경꺼리 돼 준다꼬 누가 돈 한푼 보태줍디까.”
화전 일구고 농사지으며 살던 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고 했다.
소금 살 돈은 봄에 약초 캐고, 겨울철 산죽 베어 광양만 김발 어민들에게 내다 팔아 충당했다. 하지만 길이 나면서 지리산 국립공원 구역이라고 나무도 못 베고 소도 못 키우게 됐고, 광양만에 제철소가 들어선 뒤 김 양식도 중단됐다.
“의료보험료 내라 카고, 전기 맛 보여주니 돈 내라 카고, 어디 돈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입니까. 타락요? 그라모 그 사람들한테 타락 안하고 요(여기) 와서 함 살아보라 카소.”
■ 기로에 선 청학동
하지만 마을 주민들도 급격한 변화가 내심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 주민은 “명색이 ‘도인촌’인데 뭣이 달라도 달라야 안 되겄나”라고 했다. 하동군도 지난 해 말 주민 대표들과 함께 타지 민속촌을 견학했다. 군은 청학동을 정부 지정 ‘문화마을’로 조성해 옛 모습을 보존ㆍ복원하겠다는 구상이다.
본동마을이라도 아스팔트를 걷어내 흙길을 만들고, 물레방아라도 들여놓겠다는 것이다. 난립한 음식점과 서당들도 보상금을 줘서라도 권역별로 정비할 계획이다. 군은 지난해 말 3,400만원을 들여 경남발전연구원에 문화마을 조성계획 용역을 줬다.
내달 말 계획이 나오면 절차를 밟아 하반기부터는 손을 대겠다는 태세. 일부 주민들도 ‘청학동 보존회’를 만들어 힘을 보태기로 했다.
하지만 앞 길이 순탄치 만은 않아 보였다. 자본의 생리를 알아버린 ‘서당파’의 생각이 다르고, 서당파를 ‘글장사꾼’으로 여기는 ‘식당파’의 생각이 다르다. 마을 한 켠에는 환인 환웅 단군성전을 만들어 참배객을 받는 삼선궁파도 생겨났다.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불편한 앙금이 있고, 원주민끼리도 빈부격차라는 현격한 거리가 굳어졌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마을 반상회도 제대로 안 열린다고 한 주민은 푸념했다. “너무 멀리 와삔기라. 인자(이제) 빠꾸(백)는 몬한다.
그래도 부리끼(브레이크)라도 잡을 수 있을 때 잡아봐야제.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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