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제를 현장에서 취재할 때나 후배들의 기사를 다듬는 지금이나 ‘헌터 중학교는 공부 잘하는 한인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여길 뿐 나하고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학교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두 달 전쯤 6학년생인 작은 아이가 헌터 중학교 시험을 볼 수 있는 학교장 추천서를 들고 오면서 이 학교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수재들이 몰린다는 학교에 시험볼 자격이 있다는데 어떤 부모가 말릴 것인가.
그 후 토요일마다 헌터 입시반에 데려가느라 플러싱 메인 스트릿 공용주차장에서 차 앞을 긁혀가며 민모삼천지교(閔母三遷之敎)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영어 수학은 모든 지원자가 잘하므로 에세이에서 합격 여부가 판가름 난다는데 정작 우리 애는 그 중요한 에세이에 죽을 쑤고 있었다.
"엄마 직업이 글쓰는 것인데 너는 왜 못쓰냐" 했더니 "어려서 엄마가 책을 읽어주지 않아서"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큰 아이는 처음이라 아무리 피곤해도 잠자리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려고 노력했는데 작은 아이는 단 한번도 책을 읽어준 기억이 없다.
드디어 시험 당일인 지난 10일, 하루 휴가를 내어 맨하탄 헌터 칼리지 시험장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가 핑크색 지원 카드를 들고 입장한 뒤, 그곳에서 만난 한인 학부모 2명과 함께 헌터 칼리지가 임시 개방한 강당으로 걸어갔다. 두어 블럭을 가는데 그날 따라 날씨가 춥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척 떨었다.
한 학부모가 "우리 아버지가 고등학교 시험을 보는 나를 데려다주며 떨린다고 하셨는데 아이보다 엄마인 내가 더 떨린다"고 말해 다들 동감했다.
이번 시험에는 시티 와이드 테스트 결과에 따라 소속 학교장의 추천을 받은 2,500여명의 아이들이 시험을 보아 200여명, 정확히는 185명을 선정한다고 한다.
"붙어도 플러싱 집에서 어떻게 다닐 지 걱정이야. 오늘 아침에 시험 보러 오는데도 꼬박 한시간 걸렸는데.", "겨우 붙는다고 해도 공부라면 난다 긴다하는 애들 틈에 치여서 제대로 기도 못 펴면 어쩌지?", "맨하탄 복잡한 곳에 다니자면 주위에 유혹이 많을 텐데, 차라리 집 근처 학교가 안전하고 아이도 피곤하지 않을텐데."다들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시험이 12시15분에 끝나고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몰리는 사고 방지를 위해 헌터 칼리지 건물을 돌아 몇 블럭 구간에 걸쳐 초록색 카드를 든 학부형들을 줄 세웠다. 11시40분부터 서있어도 까마득한 앞줄은 줄어들 줄 모르고 얼굴은 시리고 발은 동상에 걸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미국에서 이런 특수 학교가 왜 필요해? 그냥 가까운 거리의 학교에 보낼 걸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나 하는 후회도 잠시 했다. 한시간도 더 기다려 온몸이 동태가 될 즈음에야 학교 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에세이 주제가 뭐야?" "안 가르쳐 줘."
"왜?" "칼럼에 쓸 거잖아."말 안하려는 아이를 달래어 겨우 알아낸 이번 헌터 중학교 에세이 시험 주제는 좋아하는 음식 한가지를 들고 그것을 먹을 때의 느낌을 쓰라는 것이란다.
"너는 무슨 요리라고 썼어?"
워낙 아무 거나 잘 먹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인지라 대단히 궁금했다.
"히히, 웃겨. 김치 썼어." 나도 따라 웃었다.
김치를 담글 때면 마늘과 생강을 자기가 빻고 싶다며 절구를 가져가는 아이, 젓가락보다 손가락으로 먹는 것이 더 맛있다며 김치병 통째로 밥도 없이 김치를 집어먹는 아이가 아닌가.
헌터 다니는 한인 아이가 부지기수인데 왜 이렇게 장황하게 아이 자랑을 하냐고 하겠지만 이 아이는 킨더 가튼을 가야하는 9월을 앞두고도 ABC를 몰랐다. 그러더니 그해 여름 학원 성적표에서 빵점을 받아왔다. 도저히 포인트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였기에 이번 추천서가 더욱 신기한 것이다.
그동안에도 공부에는 별 뜻이 없어 보이던 아이가 학교장 추천서를 가져왔으니 부모 마음에 신통방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 어려운 학교에 그냥 시험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은 히히 웃으며 말한다. "바로 이것이 ‘가문의 영광’이여"하고.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