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영어만 써도 눈 째림을 당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최근 한국을 다녀온 한인들은 그 같은 기분 나쁜 경험을 이구동성으로 전한다. 어디 가서 "미국에 산다"는 말도 못하고 "괜히 죄 지은 사람 마냥 조용히 지내다 왔다"는 한탄이다.
물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붉은 악마 축구 응원하듯 번지는 ‘반미’를 마음속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주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 목소리를 높인다.
작금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미’는 분명 건전한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여중생 사망이 아무리 안타까워도, 스케이트선수 오노의 치사함에 아무리 약이 올라도 그건 아니다.
반미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한국은 오랫동안 ‘힘있는 나라’ 미국에 휘둘려온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엄밀히 ‘우리 탓’이지 ‘미국 탓’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힘이 있었다면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겠는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그동안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상황도 적지 않았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건 부수적인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준 긍정적인 역할보다 돋보일 일은 아니다.
설사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도 국제관계는 감정적으로 할 일이 아니다. 기분 나쁘다고 욕지거리해대고 남의 나라 국기를 불태우는 일은 너무 치졸하다. 냉정하게 실리를 따져 참을 건 참고 감수할 것은 감수해야 한다. 대책 없는 젊은 혈기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쨌든 미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이고,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살 수 있도록 안보를 지켜왔다. 고마운 것은 모두 잊고 서운한 것만 가지고 따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다.
그렇게 미국이 싫다면 미국으로 유학도, 이민도 오지 말아야 한다. 관광이나 원정출산은 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관광, 유학, 이민, 원정출산 등 줄을 잇는 미국행렬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스타벅스, 맥도날드, TGI FRIDAY에 가득찬 서울의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제 한국도 신장된 국력만큼 제 목소리를 내고 살아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큰소리를 쳐도 명분 있게 제대로 쳐야 한다. 여중생 사망과 관련된 미국의 처사는 분명 잘못됐다. 당연히 미국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SOFA 규정도 고쳐져야 마땅하다.
그것이면 족하다. 정도가 지나치면 반작용이 생긴다. 한국에서의 반미는 도를 넘어섰다.
벌써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한’여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미군철수가 공개적으로 논의되는가 하면 한국과의 비즈니스를 중단 내지 보류하는 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상황이 더 악화돼 미군이 철수하면 누가 손해인가. 미군만 철수하면 남북한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 무책임하고 순진하다. 북한이 원하는 형태로 통일돼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건 곤란하다.
북한이 핵을 가지면 나쁠 게 뭐 있느냐는 주장도 있다. 언젠가는 남북한이 통일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핵보유국이 되어 좋지 않느냐는 논리다.
얼추 아주 민족적이고 타당성 있는 얘기 같지만 이 역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북한이 강력한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남북한은 결코 남한이 원하는 형태로 통일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남북한간에 긴장은 완화되지 않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손안에 결정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더 기고만장해질 것은 상식이다.
짜지고 보면 햇빛정책도 결국 북한을 민주화시켜 통일로 가자는 것이 아닌가. 미군철수와 핵무기보유는 그런 북한에 시원한 햇빛가리개를 쳐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경제는 또 어떠한가. 미국내 반한 감정이 더욱 고조돼 수출을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 타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미국에 사는 2백만 재미동포가 받을 유무형의 고통은 무시해도 괜찮단 말인가.
한국내 반미감정이 이처럼 필요 이상으로 고조된 것은 대선을 의식해 정략적으로 이에 적극 대처하지 않은 현정부의 책임이 크다.
미국에 산다고 무조건 미국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 제발 오해 없길 바란다. 미국에 비굴할 필요는 없지만 배척해서는 더욱 안 된다. 억울한 것이 있어도 필요하다면 참아야 한다. 아직은 반미를 주창할 여건이 아니다.
노무현 당선자도 뒤늦게 지나친 반미를 말리고 나섰다. 반미를 반대하는 집회도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한국의 ‘반미’와 미국의 ‘반한’은 수습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후회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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