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대답이 궁해진다. 이민 생활의 연륜이 쌓일수록 미국의 정체가 더 막막한 느낌이 들어서다.
‘미국은 제국주의다’-. 맞는 말 같다. 복잡하게 역사를 들출 필요도 없다. 최근의 국제 정세만 보아도 ‘제국주의 미국의 얼굴’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파나마를 침공했다. 걸프 전쟁을 수행했다. 아이티 정권을 뒤엎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일방주의를 선포했다. 또 다시 이라크를 침공할 태세다. 분명 제국주의 미국의 얼굴이다.
‘미국은 그 자체가 문명이다’-. 이 역시 틀리지 않는 말이다. 전 세계 경제와 문화 분야의 중요한 정보들은 대부분이 미국에서 생산된다. 미국의 GDP는 전 세계의 32%를 차지한다. 연구개발 투자에서는 40%를 훨씬 상회한다. 미국의 소프트 파워가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적 가치관은 이제 보편적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은 말 그대로 ‘지구 제국’이다. 그 수도는 뉴욕이고, LA다. 이 제국의 중심부를 향해 전 세계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분명히 단순한 민족국가가 아닌 한 찬란한 문명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미국을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 실체가 너무 방대해서다.
그러면 ‘한국은 무엇인가’-. 역시 대답이 어렵다. 대선을 전후해 한국서 날아드는 크고 작은 소식들이 몹시 혼란스러워서다.
“전 세계가 북한의 핵문제를 우려, TV 방송들은 저마다 비무장지대에서 이 마지막 냉전지대에 대해 라이브 방송을 하는 등 난리다. 그러나 일부 G.I.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폭력 위험이 가장 큰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이다. 정치인들이 반미주의를 방조하고 있는 한국의 거리이다….”
“미군 병사는 말할 것도 없다. 영어를 하는 백인이면 무조건 수모를 당하는 판이다. 한 영국인 교사의 체험담은 이렇다. 쏘아보는 정도는 예사다. 가게에서는 서비스가 거절된다. 침 뱉음을 당한다. 지하철에서는 좌석이 거부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군을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보고 있다. 북한이 수십년간 주장해온 것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떠나라는데 가야지’-. 한국 청년들에게 칼부림을 당했다가 겨우 살아난 한 미군 장교의 독백이다. 그러나 칼부림보다 정작 더 충격적인 것은 8~10세짜리 아이들의 반응이다. 길에서 만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영어로 욕을 해대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보도다. 극히 배타적이다 못해 외국인에게 폭력도 불사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초등학생이 반미 혈서를 쓸 정도로 현실은 거칠어졌다. 성직자들이 ‘화형식’을 주동할 정도로 세상은 황량해졌다. ‘컴맹’이 사라지는 대신 사실상의 ‘문맹’(文盲)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시대의 반문명적 행각에도 고삐가 풀렸다….” 한 보수파 논객의 한탄이다.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탄생시킨 전환점이다’ ‘거대한 문화혁명이다’-. 한국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다른 편에서 내린 진단이다. 한국의 정치 기상도를 바꾼 젊은 세대의 역동성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분명한 것은 젊은 세대가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이 상반된 평가는 그러면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역시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기에는’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열린 민족주의가 아닌 좌파 특유의 내향성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기묘하게 공생하는 쪽으로 한국사회의 방향성이 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민족주의라는 촛불을 켜들고 있는 젊은이들. 거기다가 공권력의 방관 하에 ‘양키 고우 홈’을 외치며 폭력도 불사하는 젊은이들. 그 모습들이 겹쳐지는 곳에서 한국 사회의 좌표는 비교적 선명히 드러나는 게 아닐까.
이번 선거에서 보수-진보의 대립 축을 지배한 것은 북한, 통일, 반미감정 등 같은 쟁점들이었다. 자유와 평등, 인권, 국가의 역할 등에 대한 보수-진보간의 차이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또 한국사회에서 반미 감정은 이제 외교·통상 그리고 안보분야에서 합리적 정책 수립과 집행을 어렵게 만들만큼 커졌다. 이 점에서 그 방향성은 이미 정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쟁점은 햇볕정책과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이었다. 햇볕정책은 북한의 굶는 인민보다 북한 정권에 대한 포용이다.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은 국내적으로는 시장에 의한 소득의 배분을 부정하고 국제적으로는 글로벌리즘에 대항하는 것이다.” ‘수구파’의 독설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확한 상황 진단일 수도 있다. 하여간 각자 판단할 일이다.
‘당신은 한국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에 사는 중년층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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