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내게 가장 신선한 경험은 영어를 공부하는 것과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알파벳 쓰기를 연습하면서 내가 더 이상 초등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펜은 어른스런 기분을 내기는 좋았지만 참 조심스런 도구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잉크병이 쓰러져 노트나 책상, 옷을 잉크색으로 물들였고, 툭하면 펜촉에 종이 보풀이 끼여서 글씨를 망치곤 했다. 다행히 그런 불편한 펜을 오래 사용하지는 않아도 됐었다. 볼펜이 새로운 필기도구로 보급되면서 펜과 잉크병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소지하기 간편하고 쓰기도 편리한 볼펜, 펜대·펜촉·잉크병을 두루 챙기면서 글씨를 써야 하는 펜 중 어느 쪽을 사람들이 선호할 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1963년 볼펜이 처음 한국에서 시판된 후 대중적 필기도구로 자리잡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필체를 버린다”는 루머까지 나돌 정도로 소비자들이 볼펜에 배타적이었다.
원인은 다름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의 몸에 배인 필기‘습관’이었다고 모나미 대표 송삼석씨는 본보 한국판의 ‘나의 이력서’에서 회고 했다.
어떤 행동이 장기간 반복되면 무의식처럼 우리의 의식에 고착되어 객관적으로 아무리 좋은 것을 들이밀어도 선뜻 바뀌지 못하는 것, 습관의 힘이란 그렇게 대단하다.
새해가 되면서 ‘신년 결심’에 또 생각이 머문다. “신년 결심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넉넉잡고 2월이면 ‘결심’ 자체를 잊어버릴 텐데 쓸데없는 짓 아닐까” “새해가 되어도 새로운 결심을 안하면 언제 또 기회가 있나”등 수없이 반복되어온 연례 통과의례를 또 거치는 것은 ‘습관’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신년 결심이란 익숙함으로부터의 탈출, 습관과의 대결이다. 음주, 흡연 같은 나쁜 습관은 버리고, 안락한 게으름에서 벗어나 규칙적 운동 같은 좋은 습관을 새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 새해 결심의 내용이다.
미국에서는 전체 성인의 40~45%가 신년 결심을 한다는데 성공률은 별로 높지 않다. 60% 정도가 두달쯤 결심을 이어가고, 6개월이 되도록 결심을 이행하는 사람은 1/4을 조금 넘는다고 한다. 성공의 열쇠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결심의 내용을 기어이 실천하겠다는 굳은 의지. 아울러 “새해부터는 담배를 끊는다(체중을 줄인다/공부를 시작한다 등)”고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남들 앞에서 말한 것이 족쇄가 되어서 두달 지킬 것을 서너달 지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죄를 손님에 비유했다. 죄가 처음에는 손님이지만 그대로 두면 그 집의 주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습관이든 처음에는 예의 갖춘 손님처럼 조심스럽게 찾아들지만, 내버려두면 어느새 주인이 되어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그리고는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면서 좋은 습관은 성공과 번영, 행복의 밑거름이 되고, 나쁜 습관은 실패, 불행 혹은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운명의 상당 부분을 습관이 결정한다고 할수도 있다.
그런 막강한 습관을 웬만한 결심으로 맞서봤자 백전백패인 것은 누구나의 경험이다. 당당하게 집주인 행세하는 해묵은 습관을 내쫓고 새 습관을 불러들이려면 집을 다시 짓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과 행동을 담는 그릇,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성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고 했다. 이런 비유가 나온 것을 보면 2천년전 유태인들에게는 포도주 담기가 우리 민족의 장담그기처럼 일상적이었던 것 같다. 포도주란 포도를 으깨서 발효시킨 것이다.
새로 만든 포도주를 당시에는 가죽부대에 담아 숙성시켰는데 술이 그 안에서 다시 발효되는 경우가 많았다. 발효 측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발효가 덜 끝난 상태로 보관했기 때문이다. 술이 발효되면서 탄산가스가 나오고 그로 인한 압력을 신축성이 좋은 새 가죽부대는 수용하지만 딱딱하게 굳어진 헌 가죽부대는 감당하지 못해 터지곤 하면서 이런 비유가 나왔다.
새해란 1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한번 새롭게 살아볼 기회를 얻는 것이다. 지난해, 그 전해의 낡은 가죽부대를 또 다시 펼쳐들고 2003년이라는 새해를 담는다면 올해도 기대할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익숙한 만큼 편한 낡은 가죽 부대를 이제는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새 부대 없는 신년결심은 무의미하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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