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교회 역사 가문에 면면히”
1대 증조부 정주복
(한국 기독교선구자)
2대 조부 정용철
(찬송가 369·178 명성)
3대 부친 정재두
(잭슨빌 한인장로교회 개척)
4대 정계성
(나성영락교회 EM부목)
나성영락교회의 영어목회(EM) 부목사로 2세 목회를 하고 있는 정계성 목사(31)는 한국 기독교계에서 흔치 않은 4대째 목사다. 1889년생인 증조부 고 정주복 목사가 20대 중반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후 한국 기독교의 초창기 목회를 했고, 조부인 정용철 목사(84)는 한국과 미국에서 50년 이상 목회를 하다가 은퇴 후 영하장학재단을 설립, 차세대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부친인 정재두 목사(64)는 오리건주 포틀랜드 갈보리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1세 목회를 하고 있으며 정재두 목사의 동생 정재흥 목사도 그린스보로 한인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또한 정재두 목사의 숙부인 정용섭 목사는 캔사스 한인장로교회의 원로목사로 고 정주복 목사의 자손 5명이 한국으로부터 시작해 미 전역에 흩어져 이민목회에 몸담고 있다. 정용철 할아버지 목사, 정재두 아버지 목사, 정계성 아들 목사, 3대에 걸쳐 살아 숨쉬는 이민교회 역사의 숨결을 느끼면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민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들어봤다.
정용철 할아버지 목사는 1970년 워싱턴 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이민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철저한 신앙교육에 초점을 두고 확실한 신앙고백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강조해온 정목사는 워싱턴 DC를 비롯해 곳곳에 세워져 있는 직장인을 위한 예배공간 ‘정오의 샘터’의 창립자이며 찬송가 369장과 378장의 작가로 교계에 널리 알려진 목회자다.
83년 워싱턴 한인연합장로교회를 은퇴하고도 시애틀 필그림 장로교회와 애나폴리스 한인등대교회를 개척했고 교회분열, 후임자 선정 등 문제가 발생한 교회들의 요청에 따라 6개 이민교회에서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임시목사로 재직했다.
정용철 목사는 “교회를 모르고 이민생활의 위안을 받고자 무작정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교인층을 구성하다보니 교회관이나 신앙관이 체계적으로 성장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정 기간이 지나 교회 직분을 맡게 되면서 감투에만 집착해 많은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올바른 교회상 확립을 위해 1세 교회들을 순회하다 보니 2세 목회를 이끌어갈 영어권 목회자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1998년 목회 50주년 회고문집 ‘하늘과 땅의 조화’ 출판기념회 수익금으로 ‘영하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영하장학재단은 1.5세와 2세 목회자 양성을 취지로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7명의 영어권 목회자를 배출했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 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학비가 없어서 중퇴하고 시골 사립학교 교원으로 일했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정용철 목사가 신학공부를 시작한 건 평소 자신을 점찍어 두었던 옥호열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서다. 옥호열 선교사는 한국기독교협의회가 구국전도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던 1950년 한경직 목사와 함께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쇄되고 만주 은진중학교로 옮겨 신학공부를 했던 정용철 목사는 1937년 당시 성경교사였던 김재준 박사의 초청으로 한경직 목사가 학생집회를 인도했을 때 받은 감동으로 목사가 될 결심을 했다. 이후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가리봉 장로교회 전도사, 흥해제일교회 전도사를 거쳐 1950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서울 신암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돼 16년간 목회를 했으며 1970년 도미, 지난해까지 이민목회현장에서 일했다.
정용철 할아버지 목사가 기억하는 부친 고 정주복 목사는 자기 것을 모두 희생해 가면서 돕고 베푸는데 한 평생을 바친 목회자였다. 밤낮으로 시골교회를 걸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던 고 정주복 목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양반 출신. 가문 유일의 한학 이수자로 기대를 모았던 고 정주복 목사는 1920년대 중반 기독교 복음을 전해 받은 후 문중에서 배척 당하고 마침내 땡전 한 푼 없이 집밖으로 쫓겨나는 설움을 겪었다. 집안의 멸시와 핍박이 이 정도였다면 고 정주복 목사가 권서로 시작해 전도사, 목사가 돼 복음의 씨앗을 한국 땅에 심는 전도자로 일생을 헌신하며 받은 박해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3대째 목사가 된 정재두 아버지 목사는 좀 다른 길을 걸었다. 일본 아오야마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결코 목회를 하지 않겠다며 평신도 사역을 고집하다가 뒤늦게 소명을 깨달았기 때문.
“대대로 목사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개인 집이라곤 소유해본 적이 없고 목회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교를 다녔어도 기독교 교육이나 사회사업에 관심을 가졌지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정재두 아버지 목사의 고백은 과거 목회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이었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정재두 목사는 평신도로 잭슨빌 한인장로교회를 개척했고 장로회 애틀랜타 연합교회 집사장, 남선교회 회장, 시무장로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것이 45세가 넘은 나이.
“평신도로 최선을 다해 사역했지만 직접 봉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순간적, 감정적이 아닌가 반문하면서 기도한 끝에 목사가 됐다”고 밝힌 정재두 목사는 1983년 에덴스 한인장로교회를 개척, 2년 후 미국장로교 에덴스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장로교 리빙워터스대회 한인교회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한 정목사는 “아들 정계성 목사가 당시 중학생 시절 앨라배마주 헌츠빌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는데 이 시기가 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계기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재두 목사가 88년 6개주 한인교회 연합 노인수양회를 개최하면서 청소년수양회도 기획했는데 마땅한 적임자가 없어 당시 17세인 아들 정계성 목사에게 청소년 수련회 프로그램 진행을 맡겼던 것. 어린 나이에도 연합 수련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정계성 목사는 이후 미국 교회에서 프로그래머로 초청되는 등 영적 리더로 쓰임 받아왔다고 한다.
헌츠빌 한인장로교회, 낙스빌 한인장로교회, 리치먼드 한인장로교회 유스 디렉터를 거쳐 1997년 애틀랜타 한인장로교회 영어목회(EM) 교육담당 디렉터와 청년부 전도사로 사역한 정계성 목사는 2000년 나성영락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로 부임해 현재 짐 박(박형은) 목사를 도와 영어목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회의 표상”이라고 자신 있게 밝히는 정계성 목사는 “목회자로서 평생 겸손과 섬김의 삶을 걸어온 할아버지와 목회자의 사명감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평신도로 헌신적인 열정을 받치다가 늦게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아버지가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했다.
“두 분에게서 물려받은 한국교회의 깊은 영성과 미주 한인교회의 전통을 토대로 영어목회를 생명력 넘치고 역동적인 미래의 한인교회로 키워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히는 정계성 목사는 “미 전역에 1세 한국어 목회와 강한 결속력을 지닌 2세 영어 목회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고 또 이들이 영적 부흥을 거듭해 지금 1세들이 2세 목회를 적극 지원하듯이 앞으로는 2세 목회가 1세 목회를 다각적으로 지원하는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뜨겁게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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