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자존심과 반미주의 구분돼야
세대간 흑백논리 지나치게 단순
미국내 주한미군 철수론 비등
반미·친미보다 미국 아는 일 필요
해마다 연말이면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비롯 어느 때 못지 않게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났다. 본보 위원실 좌담을 통해 예상을 깬 노무현 후보의 당선과 한미간의 주요 현안인 반미 감정, 북한 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참석자
▲옥세철 논설실장 ▲민경훈 편집위원
▲권정희 편집위원 ▲박봉현 편집위원
▲옥세철 논설실장: 말 그대로 격동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예상을 뒤집은 해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월드컵 4강 신화가 그래요. 16강만 가도 나쁘지 않다는 기대였지요. 그런데 4강 신화가 탄생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탄생도 그 연장 같아요. 본국지를 보니까 노무현 진영 사람도 ‘천운’이란 말을 했더라구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민경훈 편집위원: 노무현 후보의 승리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6·25에 찌든 구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승리’ ‘오프라인에 대한 온라인의 승리’ 등등. 그러나 이번 선거는 2% 남짓한 표 차로 승패가 갈렸습니다. 100명의 유권자 중 1명반만 마음을 고쳐 먹었다면 결과가 달리 나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언론에서는 ‘역시 기득권 층의 벽은 두꺼웠다’부터 ‘노무현 참패의 근본 원인’ 등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기사들을 썼을 것입니다. 2%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박봉현 위원: 한국 대선은 새로운 희망과 도전을 안겨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진보와 보수와의 싸움에서 진보세력이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보수세력이 건재하고 막강하다는 현실을 무시한 무리수는 심한 마찰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노무현 정권 첫 해엔 이 소리가 유난히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권정희 편집위원: 정치나 사회문제보다는 저 한 몸 편하고 즐겁게 사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평판을 들어온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번에 힘을 합쳐 투표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드컵을 범국민 축제를 이끌어간 저력,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기어이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저력이 그들 젊은 세대의 힘입니다. 한국의 저력이지요.
▲민위원: 젊은 세대는 옳고 나이든 세대는 잘못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2분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든 세대가 인터넷에 약하고 새로운 실험에 조심스런 것은 사실이나 반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론과 실제가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보다는 젊은 에너지와 나이든 경륜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위원: 노 당선자는 입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유세 중에도 말실수로 곤욕을 치른 바 있는데 당선 직후 또 섬뜩한 표현을 했습니다.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것이란 게 바로 그것입니다. 부조리를 청산하고 일벌백계의 일침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국가 지도자가 쓸 표현은 아닙니다. 외유내강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민위원: 노무현 당선자는 인권 변호사로 명성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햇볕 정책을 계속하겠다’는 것말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돼서도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을 고집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권위원: 이번 대선을 이야기하면서 특이했던 점은 대부분 ‘누구를 지지하느냐’와 ‘누가 당선될 것 같으냐’를 구분해서 의견을 물었던 점이었어요. 한국 여론조사에서 지지도와 당선 가능성을 구분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A후보를 지지하지만 한국 유권자들의 성향으로 보면 B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며 미리 결론을 내린 때문입니다. 지레 짐작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번 선거가 보여주었지요.
▲박위원: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한인들은 희색이 만면한 반면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은 풀이 죽은 게 사실입니다. 특히 이 후보 지지자들은 두 번째 고배를 마신 셈이니 더욱 그러하겠지요. 하지만 이번 일로 한인사회가 서로간에 껄끄러운 분위기가 지속돼서는 안 됩니다.
▲옥실장: ‘미국의 북한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다’-. 한국의 대선을 바라보는 미 언론의 일치된 시각이었습니다. 여중생 사망사건에 한국민이 그토록 분노할 줄 몰랐고 또 여기서 비롯된 반미정서가 선거의 주요 변수가 된 데 대한 놀라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권위원: 북한도 북한이지만 우리의 입장을 더 애매하게 만든 것은 한국의 반미정서이지요. 미군 차량에 여중생들이 치여 사망한 사건이 대통령 선거운동 열기와 맞물리면서 휘발유에 불을 붙인 형국이 되었습니다. SOFA를 거론할 것도 없이 한미관계에서 한국이 항상 저자세였던 것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던 일이지요. 나라가 약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지요.
그런데 이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민들이 그런 관계를 굴욕적이라며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민족적 자존심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라고 봅니다. 단지 그런 민족적 자각이 불순하게 이용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박위원: 반미로 시끌시끌합니다. 이곳에 집이 있고 직장이 있으며 자녀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한인들로서는 입장이 애매합니다. 반미의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발붙이고 있는 곳이 미국이라서 불미스런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새해엔 ‘반미’가 시들해지고 한미 우호관계가 돈독해졌으면 합니다.
▲민위원: 한국인의 반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동안 눌려온 데 대한 반발 심리입니다. 우리도 이만큼 컸으니 그에 상당하는 대접을 해달라는 것이죠. 또 하나는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입니다. 여중생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뜬 글 들 중에는 이게 한국인이 쓴 건지 북한 사람이 쓴 건지 분간이 안가는 글들이 많습니다.
반면 미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는 글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한국민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반미도 친미도 아닌 지미(知美)라고 생각합니다.
▲권위원: 이민자로 미국에서 사는 한인으로서는 특히 가슴 조릴 일이 많았지요. 부시가 연초 ‘악의 축’으로 북한을 지목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기는 했습니다. 미국의 강경 일변도에 북한이 핵을 들먹이며 맞대결로 나오니 사태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옥실장: 노무현 당선자 탄생 후 나온 월스트릿 저널의 사설은 한국 대선을 보는 미국의 보수층 입장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대선의 승리자는 북한’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수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지적도 했어요.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권위원: 한국민의 반미정서에 대해 미국 언론들이 감정적으로 나오는 건 염려스럽습니다. 주류 언론의 사설이나 칼럼에 짜증스러움이 엿보일 때가 있어요.
한국민들이 주한미군을 필요 없다고 하는데 왜 굳이 군대를 주둔시키는가, 철수시키면 골치 아플 일이 없지 않느냐는 식이지요. 부시 행정부가 중국에 압력을 넣어 탈북자들을 받아들이게 해라. 그래서 북한이 무너지면 주한미군도 필요 없지 않겠느냐는 사설도 있었습니다.
▲민위원: 한미간의 시각 차의 가장 큰 원인은 서울과 워싱턴이 휴전선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말로 안되면 폭격을 해서라도 북한의 핵 개발을 막겠다”는 것이고 한국에서는 “그러면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 양측 입장입니다. 햇볕 정책이 ‘퍼주기’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실장: 앞으로 북한 핵문제는 계속 에스컬레이트 된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어떤 입장을 보일지, 또 어떤 외교 역량을 보일지가 관심입니다. 국제정치는 감상적 민족주의가 먹혀들기 힘든 냉엄한 현실이라는 점을 얼마나 숙지하고 이를 디지털 세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가 숙제 같습니다.
▲박위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라크와 북한 핵문제는 새해에도 줄곧 이어질 것입니다. 단순히 국제정치 이슈가 아니라 사태 추이에 따라 우리 경제와 사회 안정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이슈입니다. 새해엔 당사자와 주변의 노력으로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랍니다.
▲옥실장: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소리가 한국의 대선 후 자주 나옵니다. 이 역시 한국서 팽배하고 있는 반미정서와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미국 당국자 입장에서 특히 곤혹스런 부문은 한국민이 보이고 있는 북한 위협 불감증 같아요.
대선 전에 월스트릿 저널 발행인이 햇볕정책을 비난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논평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주한미군 철수론은 이러다가 콘센서스로 굳어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리 -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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