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동생과 함께 밤늦게까지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듯 개표상황을 지켜보며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도입된지 54년이 흘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제 제법 자리잡힐 만한 시간이다. 그러나 8명의 전직 대통령들의 말로가 한결같이 본인과 민족에게 불행하게 끝남으로 인해 존경받는 퇴임 대통령을 갖지 못하는 실정이다. 즉 민주주의가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대표되는 낙후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선거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큰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
첫째, 호남지역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16개 시도 가운데 10군데에서 우세를 보이며 골고루 지지를 받은 영남출신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지역 감정의 골이 깊은 양 지역을 화합시킬 수 있는 첫 대통령이다.
둘째, 군사독재와 3김으로 대표되는 낡은 정치시대가 막을 내리고 56세의 상대적으로 젊은 인물이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가신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인 봉건제도와 혼합된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기존의 정치체제가 평등적, 수평적이며 다양성을 허용하는 본연의 민주주의로 한 발짝 접근하게 되었다.
셋째, 냉전체제 하에서 타부시되었던 다양한 이념들이 선거라는 민주적 검증과정을 통해 수렴되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그동안 기존의 구태의연한 정치체제에 염증을 느껴정치적 무관심 내지는 혐오감을 표출하던 젊은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였다는 것이다.
넷째, 노 후보의 당선은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이 결국 정치적으로도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표현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정치적 소신을 바꾸는 경우와 경선에 이기면 승복하고 지면 불복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노 당선자는 자신의 단기적 이익보다는 원칙과 질서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왔다.
21세기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노무현씨에게는 험난한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첫째, 점증하는 한국 내의 반미감정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반미감정의 근본 원인은 ‘미국의 오만함’과 한국의 자존심 회복으로 귀착된다. 노 후보는 ‘수평적이고 균형 있는’ 한미관계를 정립하겠다고 하였다. 그의 미국에 대한 견해는 보수층의 우려를 자아내었고 선거기간 쟁점의 하나였다. ‘반미’라는 용어가 거침없이 사용되며 ‘방미 투쟁단’ ‘백악관에 대해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격’등 문자 그대로 한다면 마치 미국이 적국이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테러와의 전쟁중에 있는 미국과의 관계는 냉철한 현실적 인식 위에 한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 냉전시대의 잔재가 아직도 존재하는 한반도에서 남북관계는 민족의 흥망에 바로 직결된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한 이후부터 경색되기 시작한 미국과 북한의 관계 그리고 북한의 제네바협정 파기로 야기된 북핵 문제 등은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노 후보는 햇볕정책을 승계한다는 입장이지만 이에 대한 새로운 조율과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여야 한다. 또 정치적 이유로 북한의 인권과 탈북 동포들에 대한 관심이 소홀히 되지 말아야 한다.
셋째, 경제적 발전에 걸맞는 정치적 선진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적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다행히도 지난 경선과 후보단일화 와중에 노 당선자 주변의 철새들이 스스로 다 떠나가 선거 중에는 직업 정치인들과 이익단체들보다는 자원봉사자들에 많이 의존하였으므로 그만큼 자유롭게 새로운 정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인치에 의한 제왕적 대통령 자리를 법치에 의한 민주적 대통령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미국 사는 동포로서 바라는 바는 2003년 말이면 소멸되는 기존의 재외동포법을 개정하여 재외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지난 6월 월드컵 4강 진출시 표출된 한민족의 단합과 정체정 확인이 한국의 정치적 발전을 통해 더욱 재고되었으면 한다.
임진혁 새크릿 하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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