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우려와는 달리 1991년 걸프전이 미국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의 인기는 하늘 무서운 줄 몰랐다. 민주당의 대선 선두주자로 손꼽히던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부시의 기세에 눌려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자 민주당 대선 주자로 별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온갖 정치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언론들은 이들을 ‘거인’ 부시에 빗대 ‘일곱 난쟁이들’이라고 불렀다. 그 중 한 명이 아칸소 주지사로 있던 빌 클린턴이다. 걸프전 직후 부시가 클린턴이라는 애송이에게 나가떨어지리라고는 신이 아니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4년 민주당 선두주자로 유력시되던 앨 고어가 출마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온갖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정견을 밝히고 부시를 비난하는가 하면 전국을 돌며 아내 티퍼와 함께 쓴 책 사인회를 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편 뒤 나온 발표라 다소 의외로 들리기도 한다.
공식적인 이유는 “다시 2000년의 아픈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아서”이지만 실제는 부시와 다시 붙어서 승산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북 투어 반응이 예상만큼 뜨겁지 않은데다 모금도 잘 안되고 민주당 중진들이 조용히 말렸다는 뒷소문이다.
고어 불출마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시의 높은 인기다. 2000년 대선에서 고어보다 적은 표를 얻고도 대통령이 돼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던 부시는 9·11 이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발휘, 미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더군다나 지난 번 중간 선거에서 후보 지원 유세에 적극적으로 나서 예상을 깨고 승리함으로써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2년도 남지 않은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군소 후보에게 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시의 재선은 과연 확고부동한 것일까. 욱일승천 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부시의 앞날은 탄탄대로이지만은 않다. 우선 이라크와의 전쟁이다. 지금까지 투여한 군사적 정치적 자본을 감안할 때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칼을 다시 칼집에 꽂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하면 틀림없이 이기겠지만 얼마만한 사상자가 나느냐와 그 후 뒤처리가 문제다. 91년 걸프전 때 워낙 쉽게 이겼기 때문에 미군 사상자가 많이 나면 이기고도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보다 부시 재선에 위협적인 요소는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경제다. 부시는 충성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리더다. 지난 한 달 사이 로열티라는 부분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재무장관과 경제 수석, 증권거래 위원장을 모두 간 것은 부시가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문제는 경제는 대통령의 뜻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 부시도 1992년 한해 동안 경제를 호전시켜 보려 무진 애를 썼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거대한 미국 경제를 움직이기 위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적다. 미국의 통화와 금리 정책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가 독립적으로 결정한다.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재정 정책인데 그나마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동의를 받는다 해도 연방 예산은 미 경제 규모의 20% 정도이며 그 중 2/3는 소셜 시큐리티와 메디케어 등 줄일 수 없는 부분이다. 나머지 1/3도 상당 부분 고정 비용으로 실제로 대통령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은 미미하다. 그나마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치려면 수개월에서 1년의 시차가 필요하다.
지금 부시가 경기 활성화를 위해 구상하고 있는 것은 현 시한부 감세안을 영구화하는 것을 포함한 각 종 세금 감면이다. 그러나 대대적인 감세는 이미 증가하고 있는 재정적자를 악화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엄밀히 말하면 90년대 중반 이후의 호황이 클린턴 탓이 아니 듯이 90년 불황도 아버지 부시의 탓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경기가 좋건 나쁘건 이를 대통령의 책임으로 돌린다.
“역사가 내 편에 서 있는 한 온 우주가 힘을 합쳐도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그러나 역사가 나를 버리는 날 한 방울의 물도 나를 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말은 모든 정치가들에 적용되는 격언이다. 앞으로 2년 동안 실업자가 계속 늘 경우 철통같아 보이는 부시의 아성도 무너질 것이다.
민 경 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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