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사는 50대 여성독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송년모임 시즌이 되면서 남편과 ‘또 한번’ 논쟁을 벌인 것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였다. 그의 남편은 한인들 모임, 특히 동창모임에 갔다오면 기분이 상하곤 하는 모양이다.
“남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고급차’입니다. 모임이 호텔에서 행해질 때 발레파킹을 하고 여러 명이 자기 차가 올 차례를 기다리는 데 거의가 벤츠나 렉서스, BMW입니다. 포드를 타는 남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옆에서 느낄 수가 있지요”
경제적 여건으로 보면 ‘고급차’를 못 탈 형편도 아니지만 그런 호사스런 차를 과시하듯이 타는 것이 왠지 ‘속이 빈 행동’같아서 자신은 극구 반대한다고 했다.
“남편은 저 더러 결벽증이 있고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이 있는 여자라고 합니다”
“‘좋은 차’라서 선호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라는 남편,
“그런 차는 ‘좋은 차’가 아니고 ‘사치스런 차’다. ‘좋은 차’란 연비가 높고 안전하며 고장이 적은 차다”라는 아내의 주장이 항상 팽팽하게 맞서는데, 이제까지는 아내가 판정승을 거둬온 것 같다.
하지만 ‘자동차 허영’이 유난스런 한인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를 거스르며 그가 혼자 버티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남편이 저렇게 원하는 데 ‘그래요, 우리도 삽시다. 그래서 보란 듯이 탑시다’라고 해야 할까”“남편 말대로 나에게 못된 결벽증이 있는 걸까”- 그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자동차가 호사스럽다는 것은 미주류사회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행사에 가보면 확연하다. 지난 가을 LA 다운타운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한반도 정세’가 주제여서 한국문제에 관심있는 주류사회 학자들과 한인들이 참석했다.
세미나가 끝난 후 주차장에서 줄지어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발레 요원이 벤츠나 BMW 같은 고급차를 몰고 오면 십중팔구 한인이 차주인이고, 10년쯤 돼 보이는 허름한 자동차가 오면 거의 예외없이 미국인이 차로 걸어갔다. 참석 미국인들이 대부분 학자였기 때문에 더 그러했겠지만 그들의 낡은 차 앞에서 나는 좀 민망했다. “당신들보다 늦게 이 땅에 온 이민자이지만 우린 이렇게 잘 산다”는 자부심은 생기지 않았다.
앞의 편지를 받은 후 주변 사람들과 ‘자동차’이야기를 해보았다. 대부분이 “한인들은 너무 좋은 차를 탄다. 차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민와서 일만 하는 데 무슨 낙이 있는가. 나이가 50대쯤 되면 좋은 차를 타고 즐기며 사는 것도 괜찮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한인들의 자동차 사치가 “나이들어 너무 허름한 차는 사실 신경이 쓰인다”는 체면의식, “저 친구가 저런 차 타면 나도 이 정도는 타야…”라는 비교심리, 남들한테 그럴 듯한 존재로 보이고 싶은 과시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은 누구나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바이다.
사치는 덧없는 것이지만 모든 사치가 비난의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심리가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개개인이 땀흘려 일하도록 자극하는 추진력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에 사치를 부리느냐이다. 사진작가가 사진에 대한 열정 때문에 카메라 사치를 좀 부린다면 그것은 삶의 재미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동차 사치는 대개 물질만능주의가 짜놓은 틀과 기준에 비판없이 끼여들려는 무분별함을 담고 있다. 한 자동차 정비업소 주인이 들려준 케이스가 그 좋은 예이다.
“벤츠를 산지 5년이 되었는데 1만5,000마일을 못 탄 손님이 있습니다. 차를 계속 세워두다보니 배터리가 죽어서 배터리만 3번 갈았지요. 리커스토어 주인인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12시간 일합니다. 가게가 빈민촌에 있으니 벤츠를 가지고는 거기에 못 갑니다. 그 좋은 차를 탈 일이 없는 것이지요”
나의 삶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어떤 드라마가 될까. 첫회만 보면 줄거리가 짐작되는 개성없는 삶은 아닐까. 자기 삶에 대한 창조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창의성 없는 삶이 경제적 여유만 있다하면 천편일률적으로 ‘고급차’를 타게 만든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