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거철이면 으레 등장하는 말이 ‘October Surprise’다. 투표일을 며칠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의 기습적 폭로작전을 의미한다. 이 말을 한국의 시사용어에 대입하면 ‘‥풍(風)’이 가장 적합 할 것 같다. 병풍(兵風)이니, 북풍(北風)이니 하는 용어 말이다.
이 ‘‥풍’이란 말에서는 음모의 냄세가 물씬 난다. 정치적 목적을 띈 모종의 음모에 의해 항상 뭔가가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고 있다는 시각이 내재돼 있어서다. 이 시각에서 보면 자연발생적 상황이라는 건 없다. 특히 정치와 관련된 사건이나 사태에는 반드시 뒤에 뭐가 있다고 본다.
음모론은 항상 그럴 듯 하게 들린다. 하기야 그 플로트가 너무 황당하면 더 이상 음모론이 아니니까. 음모론은 유용한(?)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밀실서 이루어지는 정치, 얽히고 설킨 것 같은 정치 국면도 그럴듯한 세팅의 음모론에 입각해 보면 때로 수읽기가 수월해서다.
“절대절명의 위기다. 이대로 가면 필패다. 기사회생의 묘수가 없을까. 여중생 미군 장갑차 윤화사건이라. 뭔가가 섬광처럼 스쳐간다. 국면전환의 호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장갑차에 깔린 어린 소녀의 참혹한 죽음.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 분노는 반미정서로 이어진다. 미군 당국은 가해 병사들을 방면했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선동선전이 전개된다.”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반미정서가 날로 확산된다. 젊은층이 동요한다. 젊은 세대를 파고드는 반미정서는 표 행사로 이어질 수 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반미정서를 잠재울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결자해지(結者解之)심정으로 미국을 바라본다. 그런데 한 소식이 날라들었다. 북한 화물선이 미사일을 싣고 가다가 인도양에서 적발된 것이다.”
음모론적 시각에서 읽어본 한국의 대선국면이다. 음모론인 만큼 누구나 펼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그런데 한국의 반미정서, 또 이와 맞물린 대선국면을 바라보고 있는 미국 언론의 시각도 다분히 음모론적이다. 그래서 주목된다.
“미대사관 앞에 만여명의 촛불시위자를 결집시킨 여중생 사망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DJ의 후계자 노무현이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반미시위와 관련해 일제히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미언론이 특히 촉각을 세우고 있는 부문은 노 후보의 반미노선이다. 시위자들 앞에서 ‘북한의 안보 보장’을 공약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하면 이렇다. 여중생 사망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그 전부터 한미관계는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많았다. 최근의 단초는 DJ와 부시의 불편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체제를 보는 현격한 시각 차이가 결국 한국내에서 반미분위기 확산을 불러왔다는 진단이다.
그 보도의 행간에는 음모론을 경계하는 시각이 엿보인다. 확산되고 있는 반미움직임, 그리고 그와 맞물린 한국대선의 흐름. 뭔가 배후세력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다.
“왜 부시 행정부는 이 시점에서 북한 미사일 문제를 이슈화 하고 있는가. 북한이 미사일 수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수년전부터 알려진 일이 아닌가. 미국은 미사일 수출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 수송선을 나포하자 DJ의 측근 인사가 한 말이다. 물론 미 언론의 보도 내용이다. 역시 음모론을 경계하는 시각이다.
미국측이 북한 미사일선 나포 사실을 DJ에게 알린 게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의 청와대 방문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인데 한국 정부는 아무 공식적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선을 불과 한주일여 앞둔 타이밍에 북한 미사일 변수가 발생한 데 대해 한국 정부측은 불편한 기색과 함께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재삼 하는 이야기지만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이다.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한국의 대선가도를 맞아 노출되는 이런 음모론적 시각들은 한 가지 사실의 윤곽을 떠올리게 한다는 생각이다. 올해의 대선은 ‘21세기 한국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선거’라는 사실이다.
전례없이 악화된 한미관계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의 외곽궤도를 돌던 한국이 대륙쪽으로 방향을 트는 기미다. 미국은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인 업은 이미 정해졌다. DJ-노무현-반미 진보세력, 그리고 아마도 북한, 그리고 중국까지가 한 축일 수 있다. 이회창-친미 보수세력-미국, 그리고 일본이 그 반대 축이다. 이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중심부와 주변부,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남은 건 한국민의 선택이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그 라인 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보여서다. 게다가 좌와 우의 대결은 민주와 비민주 구도에서의 대결 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반세기에 걸친 한국민의 체험이다. 이게 되풀이 되는 건 아닌지….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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