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는 시민과 학생 만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촛불시위가 열렸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들을 추모하고, 가해 미군병사의 무죄방면에 항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하니 광화문을 우리 영혼으로 채우자’는 제안이 인터넷상에 올라오면서 자발적으로 모였다 한다. 월드컵의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자리에, ‘아침이슬’과 함께 수천개의 촛불이 어둠을 밝히는 장면은 장관이면서도 슬픔이었다….”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미 대통령의 사과도 소용없다. 한 네티즌에 의해 제창된 촛불시위는 닷새째 이어지고 있다. 주말에는 전국 대도시에서 동시에 열릴 예정이다.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자식들이다. 그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그런데 ‘오만한 미국’은 제대로 사과조차 않는다. 거기다가 무죄방면이라니. 그 아픔이 하나 둘 ‘나의 아픔’으로 전해지면서 시위는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신부들이 단식기도에 들어간다. 초·중·고교에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불평등성을 알리는 수업이 진행된다. 대중의 스타들도 나선다. 미국 성토의 포문을 일제히 연 것이다. ‘거침없는 반미(反美)’다. 계층, 세대, 지역을 뛰어넘는 반미 물결이다. 얼마나 아프면, 얼마나 자존심을 건드렸으면 그럴까.
그 아픔이 아련히 다가온다. 그런데 분노에는…. TV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접해서일까. 아니면 미국 땅에 살고 있다는 원죄 탓일까. 확산되고 있는 반미 물결. 그 현실을 대할 때 실어증에라도 걸린 느낌이다. 뭐라 할 말이 딱히 생각이 안 나서다. 그리고 상념의 파편들만 머리 속을 맴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붉은 악마’…. 두서 없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단편적 상념들이지만 합쳐져 한가지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렁이는 반미의 물결이 ‘대∼한민국’이란 엇박자를 타고 몰아치는 게 아닐까 하는 환각이다. 월드컵대회 때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시민적 연대감이 ‘반미’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다.
재차 하는 이야기지만 그 아픔, 그 굴욕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일파만파 이어지는 반미 물결의 저류에서는 그렇지만 무언가 다른 흐름도 감지되는 것 같다. 새로운 형태의 한국형 내셔널리즘이다.
핵주권 옹호론이 공공연하다. 북한의 핵도 통일하면 우리 게 아니냐는 식이다. 한 때의 한국형 베스트 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다룬 내용도 다른 게 아니다. 핵주권 옹호론이고 이를 위해서는 이념과 관계없이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드높은 긍지와 저력은 실로 일만년 유구한 역사의 유산인 것이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피의 아버지들이 문명의 씨를 뿌리고 세상을 열어 두루 밝히었던 땅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이었음을 증언하는 역사의 목소리…”
머나 먼 상고시대 단군 조선의 역사 기록서라는 ‘환단고기’에 대한 새로운 평가다. 이 책은 한국의 재야 역사학자의 필독서다. 꾸준한 베스트 셀러다.
‘이 책들이 베스트 셀러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약 같지만 새로운 형의 내셔널리즘이 형성돼 한국민의 정서로 이미 자리잡았다는 걸 알리는 것 같다. 과거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형태의 내셔널리즘이 아니다. 보다 자신에 찬, 그리고 배타성이 강한 민족주의라고 할까 그런 형태다.
그리고 붉은 악마다. 그들이 연출해 낸 붉은 해일, 붉은 환희는 한가지 가능성 확인했다. 하나로 뭉쳐진 시민연대가 가능하고, 그럴 때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오만한 미국은 당연히 성토되어야 한다. 불평등 조항으로 가득 찬 SOFA는 마땅히 개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시위도 해야 한다. 국제 사회에 호소도 해야 한다. 그러나 뜨거움만이 능사는 아니다. 냉정한 이성이 필요하다.
문제는 반미를 가장한 내셔널리즘이다. 말하자면 ‘불은 악마’로 상징되는 시민연대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합될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은 단순한 의식의 차원을 벗어나 운동의 차원으로 옮겨졌을 때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기 십상이다. 때문에 하는 말이다.
촛불은 불신과 증오, 부정과 악을 상징하는 어둠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촛불시위는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저항운동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악의 상징’이고 처절히 저항해야 할 대상인가. 판단은 각자 몫이다. 그러나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한 세기에 걸친 믿음과 이해를 바탕으로 이룩된 관계다. 촛불을 켤 그런 관계가 아닌 것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초로의 한인’이 뉴욕에서, 워싱턴에서 반미시위를 벌인다. ‘여중생 사망사건 범대책위’의 워싱턴 원정이다. 한마디로 착잡한 심정이다. 이 역시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원죄의식의 발로인가.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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