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성장기를 보낸 옛 동네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한강변을 끼고 있어 아침마다 걷고 뛰는 사람들이 강둑으로 모여들던 제2한강교 부근의 동네였다. 자그마한 집들이 자그마한 마당을 품고 옹기종기 모여있던 전형적인 소시민 거주구역이었다.
버스를 내려,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옛모습이 짐작되는 대로변을 지나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섰을 때였다. “골목을 잘못 찾아 든걸까?”- ‘우리 동네’는 거기에 없었다. 봉숭아, 과꽃 같은 일년초들이 화단을 메우던 단층집들은 사라지고 3-4층짜리 건물들이 대신 버티고 서 있었다. 가용면적을 최대한 활용해 건물을 올린후 아래층들은 세를 주고 주인은 맨 윗층에 사는 다세대 주택 건설붐이 남긴 결과였다.
나무 한그루 심을 땅도 아까워서 겨우 사람 지나다닐 통로만 제하고는 깡그리 시멘트를 바르고 벽돌을 쌓아올린 그 삭막한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사건이 최근 있었다. 한국의 초등학생이 ‘공부 스트레스’를 못이겨 자살한 사건이었다.
지난 주말 한국 천안의 한 아파트에서는 11살짜리 남자아이가 베란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유서는 없었지만 그 며칠전 쓴 일기나 친구와 나눈 채팅 내용을 보면 ‘학교, 학원, 또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생활이 아이에게 죽고 싶은 마음, 살기를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숙제가 태산같다. 공부를 하는 데 성적이 안 올라 고민스럽다. 난 그만 다니고 싶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들이 그 어린아이의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같은 일기에서 아이는 또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에)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 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30분 쉰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는 매일 등교로 하루를 시작해 학교수업, 방과 후 속셈학원, 영어학원 등을 거쳐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소년이 계산한 하루 10시간15분의 쉬는 시간도 따지고 보면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에 불과했다.
아이의 하루일과는 답답한 다세대 주택을 닮았다. 시간이라는 대지에 한뼘의 공터도 허용하지 않고 ‘공부’또‘공부’로 층을 쌓아올린 그 삭막한 삶의 구조물이 아이를 질식시켜 버렸다고 할수 있다. 경쟁사회에서 아이에게 놀 시간을 남기면 왠지 불안한 부모의 심정이 그 바탕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몇 년전 매릴랜드에서는 체사피크만의 물고기 수천마리가 떼죽음을 당해 소동이 벌어졌었다. 조사해보니 농부들이 농지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빈터를 남기지 않고 강변 끝까지 농작물을 재배한 것이 원인이었다. 강가에 나무나 습지가 있으면 농토로부터 흘러나오는 비료성분을 막을 수가 있는데 그 기능을 담당할 ‘빈터’가 없어 수질이 오염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매릴랜드 주정부는 당시 수억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강변에 나무를 심으며 농지로 개발된 땅을 부랴 부랴 공터로 되돌렸다.
아이들 일과 중의 ‘빈터’-‘쉬는 시간’을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기는 미주 한인부모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TV 앞에 붙어 있으면 “괜히 불안하고 화가 난다”는 주부들이 많다. 한국의 아이들에 비해 학원이나 과외로 인한 시달림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덜하다고 할수만은 없다. 타민족과의 비교에 따른 상대적 스트레스이다.
“아시안 부모들은 기대치가 너무 높다”“방학이나 주말에 공부하는 아이들은 아시안들 뿐이다”등은 우리 아이들의 입에 붙은 불평이다.
건축학에서는‘건축’과 ‘건물’을 구분한다. 사람이 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실내공간을 갖춘 모든 구조물은 건물이지만 그것이 모두 건축은 아니다.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조형미, 견실한 구조기술, 그리고 유용한 기능성이 갖춰질 때 건축이 된다. 사람에 대입하면 인간적인 멋과 건강한 심신, 그리고 능력이 되겠다. 아이를 숨막히는 다세대 주택으로 만들지, 미술관 같은 멋진 건축으로 만들지 건축가로서 부모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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