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윤병희>
1609년 영국인 선장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대신해 허드슨강을 탐험하는 일을 맡았다. 아시아로 가는 통로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대신 가죽과 모피의 교역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동인도 회사는 이 보고를 무시하고 헨리 허드슨을 허드슨 베이(허드슨 만)를 탐험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 탐험을 하다 허드슨은 사망하게 되었다. 가죽과 모피 교역이 전망이 있다는 그의 보고서는 동인도회사에서는 무시당했으나 암스텔담에 있는 다른 회사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죽과 모피를 교역하기 위해 1610년부터 배를 타고 올바니의 허드슨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선 배 한 척에 30세대의 가족이 타고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종교의 자유와 개인적 번영을 구하려는 목적을 가진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623년 3월 처음으로 신대륙에 왔다. 이들은 모두 불어를 하는 화란인들이었다.
그리고 1626년 맨하탄섬을 인디안으로부터 구입해 포트 암스텔담이라는 요새를 지었다. 인디안 등 외부인들의 공격에서 보호받기 위해 이같은 요새를 구축, 이민자들을 설득하며 함께 살도록 했다.
당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직원이며 군인인 올러프 스티븐스라는 이민자가 있었다. 1642년 아네트지 록커만이라는 아가씨와 결혼하고 양조업자 되면서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런대로 성공하자 자기 이름 끝에다 귀족을 지칭하는 밴 코트랜드라는 가문 이름을 붙여서 올러프 밴 코트랜드로 행세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스테파누스 밴 코트랜드가 1642년에 태어났다. 그는 판사가 됐다가 독립을 위한 개인 사병을 거느리는가 하면 1677년 뉴욕의 초대 시장으로 선출됐다. 귀족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의 유지를 실질적으로 이룬 셈이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독립군에 가담해 싸웠다. 판사로까지 임명했다 배반당한 것에 분통이 터진 영국군이 웨체스터에 있는 그의 집을 불살랐다. 그의 딸 코넬리아 밴 코트랜드를 사로잡아 문초하자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국군을 상대로 설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군 정보장교가 물었다.
“당신은 밴 코트랜드의 딸이며 반동분자다. 더 이상 변명할 말이 있는가?”“그렇다. 나는 밴 코트랜드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반동분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의 아버지도 나를 한번도 반동분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너희들이 총검으로 나를 죽인다 해도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서 물러서라.”
그녀를 에워쌌던 영국 군인들이 그녀의 위세에 눌려 길을 비켜섰다. 그녀는 무사히 독립군 진영까지 갈 수 있었다고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녀도 옛날의 마가렛 빅크만 리빙스톤 할머니의 당당하던 핏줄을 이어받아 용감무쌍하며 강인한 서부 개척시대의 여장부였다.
밴 코트랜드의 후손들은 독립전쟁 후 각국에서 몰려드는 이민자들을 잘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되었다. 즉 벌목업자들에게 나무를 팔고 그곳을 개간케 하여 이민자들에게 월세를 받아 새로운 형태의 지주로 변신한 것이었다. 소작농들도 상업성 낙농업에 종사하게 되고, 그들의 수입도 올라가니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었다. 지금의 웨체스터 카운티를 개발하기
시작하자 이곳으로 정착하는 이민자가 계속 늘어나 지금의 웨체스터 카운티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가문이 웨체스터 카운티의 거의 전부를 소유했었다. 콜롬비아 카운티와 덧취스 카운티는 리빙스톤 가문이, 웨체스터 카운티는 밴 코트랜드 가문의 소유였던 것이다.
이 시리즈를 써오는 중에 다음과 같은 동질성을 발견할 있었다. 땅을 많이 소유한 리빙스톤도 결국은 정치와 손을 잡아 메인스트림에 뛰어들었다. 밴 코트랜드 가문도 똑같은 과정을 전철을 밟았고, 슐러 등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돈을 엄청 벌어도 메인스트림에 진입해야 그들이 이룩한 부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 한인들도 이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고교생 때부터 정당 가입을 하고 소위 Grassroot로 키운다. 정당정치 속에 자라면서 장래의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별안간 하늘에서 낙하산 타고 떨어지듯 정치한다고 나서는 후보는 실패하기 쉽상이다.
이곳 명문가들은 자식을 기르면서 동시에 자기 재산 보호정책을 은근슬쩍 끼워넣고 살아온 것 같다. 또 스프링우드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때 그를 열렬히 도와온 정치인은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였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이같은 등식이 맞아 떨어지게 된다. 부모가 뿌린 씨를 자식대에서 거두는 것이니까.
허드슨 강과 크로톤 강의 합류점이 바로 이 코트랜드 저택 앞이다. 이 가문은 이곳에서 페리를 운영하기도 했다. 옛날 교통수단이 주로 뱃길이었으니 페리를 타야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때 페리를 운영하던 주막이 아직도 남아 있고 당시의 주막 내부도 그대로 남아있어지금도 볼 수 있다.
술 취한 총잡이가 연기가 나는 총을 양쪽 허리에 매달린 피스를 케이스에 집어넣으면서 나오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 가는 길
주소: Van Cortland Manor, 150 White Plains Rd.. Tarrytown, N.Y. 10591
전화:914-631-8200(화요일 휴무)
뉴욕주 I-87 North로 가다 Exit 9에서 나와서 북행, Rt. 9 North로 간다. Corton Point Exit로 가서 South Riverside Ave. 끝에 Van Cortland Manor 입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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