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감 딸 때가 지났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감을 따러 갔는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리다의 계절은 항상 게릴라전 같아서 예민하게 더듬이를 세우고 있지 않으면 다가오는 계절을 못 보기 일쑤인 것. 때를 놓친 탓인지, 역시 남아 있는 감들은 그다지 실해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두 시간이나 운전을 해서 간 데다 딴에는 선심을 쓴다고 동네사람들 몫까지 따다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플로리다의 햇살은 가을과는 무관하다는 듯 여전히 강렬했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얼굴은 벌겋게 익어버렸다. 이런 더위에 동네인심 다 쓴다며 남편은 밉지 않은 투정을 내게 부렸지만, 그러하거나 말거나 흥분을 해서 감나무 가지를 휘어잡던 나는 불현듯 어릴 때 지독하게 많이 울었다는 한 계집애를 떠올렸다. 아침에 시작하면 점심때까지 울었다는 그 계집애….
지난번 귀국했을 때 작은언니 친구가 내게 그랬다. ‘어려서 증말루 지독하게 많이 울더니. 아랫감나무에서 울면 느이 엄마가 지나가는 동네사람들 보기 챙피허니께 윗감나무로 옮겨다 놓으라고 그럴 정도였어. 그러면 우리들이 낑낑거리면서 옮겨다 놨는디, 나중에 보니께 아침에 옮겨다 놓은 애가 즘심때꺼정 거기서 울드라니께’
내가 태어난 음암면에서 살아본 것은 길지가 않다. 서산 읍내로 이사를 나오기 전의 일이니 고작해야 여섯 해. 그러므로 이곳에 남아있는 기억이라는 것도 별로 신통치가 않다. 내가 태어난 집은 눈만 크게 흘겨도 금방 허물어질 듯 허술한 초가집이었고, 그 집을 끼고 앞뒤로는 커다란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던 기억. 긴긴 겨울밤 소금물에 우렸던 감을 한 개씩 얻어먹던 것 등, 그나마 감나무에 얽힌 것이 전부인 셈이다.
이렇듯 감나무에 대한 것만 유달리 기억하는 것은 먹거리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의 배고픔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바탕 장대비가 두들기고 간 다음이면 떨어진 풋감을 주워 논고랑에 박아두고 행여 잊을까봐 표시를 해두던 기억. 그러고도 잊어버려서 애매한 동네 아이들만 다그치던 기억. 이런 이유로 우리 집 감나무는 내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모든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을 것만 같다. 봄이면 감꽃을 주우러 모여들고, 가을이면 손닿지 않는 높이에 절망을 하며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기만 하던 감나무. 모두가 중년에 접어들었을 그들이지만, 올해도 우리 옛집의 감나무는 그들의 추억 속에서 가지가 휘어지도록 감을 매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 그토록 서러웠던 것일까? 어릴 때 지독하게 많이 울었다는 나. 언니 친구의 말을 부정할 방법이라고는 물론 없는 것이다. 그 후에도 내 별명은 한참동안이나 ‘운다’였으니까. 멀쩡하게 잘 노는 나를 보고도 ‘쟤 저러다 또 울걸 뭐’ 어른들이 놀려대면, 배시시 웃으면서도 눈물을 뚝뚝 떨구던 계집애가 바로 나였으니까.
쉴새없이 눈물을 생산해냈던 어린 가슴. 맑은 옹달샘처럼 펑펑 솟구쳐 올라오게 하던 눈물의 주원료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배고픔이었을까? 아니면 6남매의 다섯 째로 별 관심도 받지 못하던 계집애의 깜찍한 작전이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생의 지독한 허기를 진작부터 간파라도 했단 말이던가?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절대로 울지 않았다. 진작에 눈물동이에 금이라도 가버린 것처럼. 아니 그게 아니라,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생의 전쟁에서 패하고 만다는 논리를 터득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흔했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지독한 생의 사막을 건너 여기까지 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울지 않게 된 나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울보였던 것이었다. 다만 가슴 깊숙한 곳에 내 눈물을 우물처럼 저장하고 있었을 뿐.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시와 동화와 소설. 내 문학의 주원료가 된 것은 전적으로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내게 그랬다. 내가 쓴 책들은 모두가 슬프다고. 소설도, 동화도, 시도 모두가 슬프다고….
문득 흐린 눈을 들어 창 밖을 바라본다. 몇 해 전 심어놓은 감나무에 달랑 매달려 있는 한 개의 감이 제법 붉은 빛을 띄우고 있다. 이제 몇 해가 지나면 우리 집 감나무에도 주렁주렁 설움처럼 감이 매달릴 것이다. 윗감나무 아랫감나무에 제법 깊은 그림자가 출렁이게 될 것이고, 손자녀석이 그 아래 앉아 앙앙거리며 울음을 터트릴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리 자식들에게 그 녀석을 번쩍 들어다 윗감나무 혹은 아랫감나무로 옮겨다 놓으라고 할 참이다. 그러고는 하루종일 울거나 말거나 내버려두라고 할 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맘대로 울지도 못하는 일이므로. 오늘은 감나무 아래서 목을 놓았다던 계집애, 대추씨처럼 까맣고 깡말랐던 그때 그 계집애가 유난히도 그리운 날이다.
한혜영
▲ 54년 충남서산 생
▲ 94년 현대시학 추천
▲ 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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