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을 잡고 동네를 산보하는 소년의 표정이 날아갈 듯하다. 큼직한 애완견도 같이 따라 나섰다. 주유소에 활기가 돈다. 한 종업원은 “손님들이 내게 말을 다 건다”며 기뻐한다.
연쇄 저격사건 용의자가 잡힌 이튿날 미디어가 전하는 워싱턴 일대의 거리 풍경이다. 24일은 워싱턴 D.C. 일대 주민들이 오래간만에 두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잔 날이다. 10월2일부터 13명이 연쇄적으로 저격당한 버지니아, 매릴랜드, 워싱턴 D.C. 일대 주민들은 지난 3주 ‘일상’이 상실된 일상생활을 하며 살았다. 수퍼마켓에 가서 시장보고, 자동차에 기름 넣고, 아이들 야구연습 보내고, 단풍 짙어지는 거리를 거닐어 보고… 평소에는 의식도 없이 되풀이하던 일상적 일들이 갑자기 목숨을 걸고야 할수 있는 ‘거사’가 되고 말았었다.
24일 용의자 체포로 사건이 일단락 난 후에도 주차장에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주유소에서 똑바로 서서 기름 넣는 사람들 표정에는 “이래도 되나?”하는 조금은 상기되고, 조금은 어색한 표정이 여전히 엿보인다. 사방이 뻥뚫린 공공장소에서 가만히 서있는 행위를 해보는 것이 너무 오래간만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문 워싱턴 지사의 후배 여기자는 “사람들 마음속의 불안이 완전히 씻겨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상황이 정말 심각했거든요. 9.11 테러 때보다 이번이 더 무서웠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외출을 기피해 거리에 사람이 없다 보니 멀리서 사람만 보이면 긴장하는 과민현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할로윈때 트릭 오어 트릿을 할수 있게 된 걸 제일 좋아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 행사가 모두 취소될 분위기였거든요”
평소에는 존재도 모르다가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대표적인 것들로 공기나 물이 꼽힌다. 직장인들의 하루중 가장 큰 고민은 “점심때 뭘 먹을까?”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극한 상황에서 사람은 음식 없이도 3주를 견딜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없으면 3일, 산소 즉 공기가 없으면 3분을 지탱할 뿐이다. 음식보다 중요한 것은 적정한 온도. 체온유지가 어려운 한랭한 조건에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은 3시간쯤이다.
물이나 공기가 몸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라면 정신에 있어서 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일상’일 것같다. 공기를 호흡하고 물을 마시듯 의식도 하지 않고 행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들이 어떤 이유로든 제한되면 정신에 미치는 압박감이 크다.
일상생활 속의 평범한 시민들을 타깃으로 삼았던 용의자 존 알렌 무하마드(41)도 ‘일상’을 박탈당하면서 분노의 화신이 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들 커가는 모습 보며 아내와 오순도순 사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범행동기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사회에 대한 증오심이 동기로 추측될 뿐이다. 아울러 워싱턴주에 살던 그가 멀리 워싱턴 D.C.까지 와서 범행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도 의문이었다. 3년전 이혼한 그의 두번째 아내가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해답이 될 것같다.
무하마드는 두 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90년대말 이혼과 사업실패로 인생의 낙오자가 된 상태에서 전처가 아이들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몰래 이사까지 해버리자 적개심이 끓어오른 게 아닌가 추측된다. 그는 성격이 불같고 난폭해서 자녀들을 학대한다는 것이 전처가 그를 피한 이유였다.
먹구름도 그 이면에는 빛나는 햇빛을 안고 있듯이 괴로운 경험 속에도 소중한 교훈이 있기 마련이다. 9.11 테러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뉴욕사람이 얼마전 테러 1주년을 맞아 이런 말을 했다.
“‘현재’와 ‘선물’이 왜 똑같이 ‘present’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현재의 삶이 곧 신이 주신 축복 즉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익숙해서 무료하기까지한 일상이 바로 신의 선물이다. 총알 걱정없이 마음놓고 거리를 걷는 행복, 주유소에서 느긋하게 기름을 넣는 여유, 등뒤 신경 안쓰고 자녀들 야구 구경하는 즐거움, 주차장에서 마냥 수다 떠는 재미 … 모두가 감사해하며 즐겨야할 소중한 우리의 일상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