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1863년 7월1일 연방군(북군)에 밀리던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전세를 일거에 뒤집을 대작전을 감행한다. 장군은 7만여 휘하 부대를 이끌고 펜실베니아주 남쪽 벌판에 진을 쳤다. 북군은 8만여명이 응수했다. 사흘간의 전투에서 5만여명이 죽고 다쳤다.
게티스버그는 그리하여 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지란 참혹한 명성을 얻었다. 또 하나, 4개월뒤 링컨의 명연설지로 세계 민주주의사에 이름을 올렸다.
청동 대포는 아직도 위엄을 잃지않고
15번 도로를 벗어나 게티스버그 입구에 들어서면 전쟁 사적지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청동 녹이 슨 대포는 포신을 여전히 열어놓고 적진을 향해 서릿발처럼 포진해 있고 곳곳의 목책 장애물은 140여년전 엄정했던 사선의 긴장감과 달리 목가적 풍경을 안겨준다.
신생 대륙의 이해관계와 미래를 놓고 패권을 겨뤘던 내전(Civil War)의 자취는 구릉과 들판에 흩어진 1천2백개의 기념탑과 조형물, 무덤들에서 완연하다.
여정의 시작은 비지터센터(Visitor Center)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2층 건물인 센터는 지도를 공짜로 주는 안내창구와 기념물을 파는 숍, 그리고 박물관으로 이루어졌다. 박물관에는 남북전쟁 당시의 대포, 소총, 군복등 군사장비와 각종 물자가 전시돼 있다. 1백여년전 내전이라… 녹슨 무기들이 주는 역사적 생동감은 불과 50여년전 남과 북으로 내전의 홍역을 앓았던 극동반도의 상처로 기억을 이끈다.
리 장군과 북군사령관의 기마동상
비지터센터 앞은 이른바 무덤언덕(Cemetery Hill)이다. 북군은 이 언덕에 방어진을 쳤다. 남군은 이 언덕을 점령하기 위해 수만의 피를 흘렸다. 언덕은 양측의 시체로 전투지이자 그대로 무덤이 되었다.
지금은 국립묘지로 조성된 무덤언덕에 들어서면 링컨 대통령이 연설한 바로 그 유명한 장소가 나타난다. 링컨의 흉상과 연설문이 양각된 채 찬바람 몰아치던 1863년 11월 19일의 풍경과 스산했던 제국의 미래, 민주주의 표상을 말해준다.
무덤 언덕은 망자들의 묘와 참전 29개 주정부의 기념물로 덮여있다. 뉴욕주는 전몰자와 부상자 이름을 새긴 높다란 기념탑을, 앨라배마 주는 남부 11개주를 상징하는 여신이 2명의 남군 병사를 보호하는 조각품을 들판에 세웠다.
버지니아주는 로버트 리 장군이 말을 탄 채 지휘하는 형태의 기념탑을 1912년 세웠다. 적장이자 패장인 리 장군의 기념물들은 링컨 로터리 인근 박물관등 이 도시의 양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빨치산이나 인민군 총사령관의 유적을 보존하는 꼴이다. 비록 전쟁의 성격이나 전후 도정은 달리하지만 이념의 칼춤을 춰온 반도민들의 협량에 시사하는 바 커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이 근처엔 북군 사령부 건물과 게티스버그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 조지 미드 장군의 기마 동상도 보인다.
박물관과 아름다운 시가지
게티스버그는 사자들의 무덤만이 아니다. 전쟁 당시 2천4백명의 인구는 7천5백여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산자들의 도시다. 옛 건축양식이 즐비한 아름다운 시가지는 무덤언덕과 코가 닿을 듯한 지척에 있다.
거리에는 아메리칸식의 레스토랑, 피자 체인점, 아이스크림 가게 등 음식점들이 즐비하며, 남북전쟁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도 부산히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매년 140만명이 이곳을 찾는다 하는데 겨울에는 펜실베니아주에서 가장 춥고, 여름에는 가장 더운 기온을 보이는 만큼 10월에도 두툼한 바람막이용 외투를 준비해야한다.
시내에는 20여개의 박물관들이 제각기 내밀한 역사를 자랑하며 진을 치고 있다.
11월 18일 이 도시에서 단 하룻밤 묵은 링컨대통령의 발자취도 남았다. 도심 중앙로터리 이름은 링컨 로터리로 명명됐다. 그가 묵었던 윌리스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변했다. 그가 기차를 타고 도착한 역사는 보수작업이 진행중이다. 역대 주요 대통령과 영부인들의 실물 크기 밀랍인형이 전시된 기념관도 있다.
전쟁 당시 게티스버그 주민중에는 스무살 처녀 단 한명만이 희생됐다. 집안에 숨어있다 날아온 총탄에 맞은 제니 웨이드 양의 집은 지금도 기념관 형태로 남아있다.
근래에 생긴 명소로는 아이젠하워 사적지를 들 수 있다. 게티스버그 초입 왼편에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사저와 농장이 자리한다.
전투지는 무덤 언덕을 중심으로 사방에 산재해 있다. 전투지는 승용차로 둘러볼 수도 있지만 25달러를 내면 전장을 한 바퀴 도는 관광버스를 탈 수도 있다. 비지터센터에서 출발한다.
타고 걸으며 이 전투지에서 맞닥뜨리는 건 기념물에 새겨진 망자들의 글과 그들의 죽음으로 이룩된 강고한 연방의, 강력한 신제국이다.
BOX1
■가는 길
애난데일에서 1시간40분, 락빌에서 1시간거리. 메릴랜드에 게이티스버그란 비슷한 지명이 있으니 혼동을 피해야한다. 495번 벨트웨이에서 270번을 타고 가면 프레더릭을 지나면서 15번 노쓰로 바뀐다. 계속 가다 펜실베니아주 경계를 알리는 간판을 본 후 첫 번째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바로 좌회전한다. 게티스버그 비지터센터란 사인판도 보이며 15번이 계속 이어지고 5분가량 달리면 게티스버그에 다다른다.
BOX2
■가볼만한 레스토랑
Dobbin House Tavern
1776년 문을 연 이래 220여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영업해온 지하 레스토랑. 비지터 센터에서 도보로 5분거리.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촛불로 밝힌 실내가 나오고 콜로니얼 스타일 복장을 한 종업원들이 맞는다. 맛은 최상급은 아니나 관광객들이 몰리는 만큼 붐비는 시간은 피하는 게 좋다.햄버거 6.25달러, 샌드위치 7.25달러. 717-334-2100.
큰 제목/게티스버그 전투 어떻게 벌어졌나
부제/불패의 명장 리 장군과 미드 사령관의 대결과 우정
남북전쟁, 왜 일어났나
1850년대 미국은 단순 농업국가에서 농공업 국가로 변모했다. 공업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된 동북지역은 공업 발전을 위해 보호무역과 연방정부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남부지역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농장 경영(plantation) 형태였다. 따라서 자유무역과 주권(州權) 존중의 지방분권을 원했다. 이러한 사회경제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한 남북간의 대립은 노예 문제로 격화됐다.
1860년 반 노예주의자인 공화당의 링컨(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링컨의 당선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공화당의 승리이며, 남부가 우세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가 미네소타등 3개주를 노예 자유주로 공포하자 사우스 캐롤라니아주등은 남부동맹 정부를 출범시켰다. 연방이 와해된 것이다. 버지니아는 남부연합에 메릴랜드는 연방에 편입됐다.
이에 링컨은 어느 주도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할 권리는 없다며 남부 7개주의 이탈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부군의 선제공격
1861년 4월12일, 남부동맹 정부가 사우스 캐롤라니아주 북군의 요새를 포격했다. 내전의 시작이었다. 북부의 수도는 워싱턴, 남부의 근거지는 리치먼드였다. 초기 남군은 매나세스의 불런 전투에서의 승리로 기선을 잡았다. 리치몬드 인근에서의 이른바 7일전쟁에서는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을 대파했다. 2차 불런 전투에서도 승전고를 울린 리 장군은 포토맥강을 건너가서 메릴랜드주를 침공했다.
링컨은 연방정부의 이름으로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포했다. 처음으로 맛보는 자유의 공기를 들여마시며 흑인들은 들떠했다.
전쟁은 미 전역에서 전개됐다. 북군은 리치먼드와 남부의 요충지 미시시피 유역 점령을 목표로 총신을 다잡았다.
남부군은 1863년 6월3일,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의 지휘아래 버지니아를 출발, 펜실베니아주로 진격했다. 주도(州都) 해리스버그가 군사적 목표였지만 전략적으로는 2년을 끌어오던 내전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회심의 카드였다.
7만대군을 일자로 배치하고
7만의 대군을 거느린 불패의 장군은 공격적이고 대담한 전략을 수립했다. 북부연합군을 넓은 장소로 유인,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남군과 북군이 만난 최후의 결전지는 메릴랜드와의 접경이자 요충지인 게티스버그. 해리슨버그를 향하던 남군 주력은 게티스버그로 방향을 고쳐잡고 북군 방어선을 위협했다.
현재 비지터센터(Visitor Center) 앞에 위치한 훗날 무덤언덕(Cemetery Hill)으로 명명된 언덕에 방어진을 구축한 북군은 8만3천3백명, 5킬로미터에 이르는 전선에서 일자로 배치, 공세를 편 남군 병력은 7만5천1백명. 내전의 승패를 가를 승부였다.
56세의 남군 사령관 리 장군과 북군의 미드 장군은 웨스트포인트를 나온 선후배 사이이자 멕시코 전쟁의 전우이었다. 리 장군은 애초 링컨의 제의를 받았으나 고사하고 고향인 버지니아가 선택한 정치적 운명을 따랐다.
첫날 양측은 각 1만여명의 병력을 잃었다. 둘째날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적진 깊숙이 들어온 남군은 보급로를 차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북군은 계속 증원됐다.
3일 북군 방어선의 정면돌파를 결심한 남군은 대규모 포격을 퍼부은 후 1만2천명의 병력이 무덤언덕으로 진군했다. 피켓 장군이 선두에 섰다. 리 장군은 예의 그대로 칼 한자루만 지닌 채 전장을 총지휘했다.
남군의 전사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탄약을 아낀 북군의 신식 3인치 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남군의 주포인 나폴레옹에 비해 사정거리와 정확도가 배가한 3인치 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남군 일부가 저지선을 뚫었으나 주력군은 들판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3일 오후 4시였다.
미드 장군의 우정
마침내 리 장군은 버지니아를 향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추격한 북군은 포토맥강에서 남군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북군을 지휘한 미드 장군은 옛 친구 리에 대한 우정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월1일부터 3일까지 사흘간의 전투에서 양측은 5만1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말도 5천마리가 이승의 초원을 등졌다. 북부에 비하여 남부의 인적·물적자원은 훨씬 뒤져 있어 남군은 회생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동부전선에서의 남군의 우세는 역전되어 남북전쟁은 일대 전기(轉機)를 맞게 되었다.
패전한 남군이 포토맥강 이남으로 후퇴하던 그 앞서 남부의 요충지 미시시피강 유역이 북군 그랜트 장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링컨의 불후의 연설
그해 11월19일 링컨은 포성이 멈춘 게티스버그를 찾았다.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 식전에서 링컨은 2분의 짧은 연설을 한다.
“지금으로부터 87년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로 시작한 총 266단어의 연설은“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로 종결됐다.
이것이 바로 세계 연설문의 기념비적 텍스트로 이름을 떨친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문이다. 나사렛 예수의‘산상수훈’에 비유되는 연설은 미국 역사를 지탱한 원칙과 비전의 틀이란 불멸성을 얻었다.
“모든 비난은 내 어깨 위에"
1864년 그랜트 장군은 버지니아를 손에 넣었다. 북군은 남하를 계속했다. 1865년 4월9일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은 리 장군은 남북전쟁의 종전합의서에 서명한다. 항복수락 연설에서 리 장군은 "이 전쟁은 나의 전쟁이고 모든 비난은 내 어깨 위에 있다~"고 영웅다운 고별을 했다.
마침내 6월5일 링컨은 남군의 수도 리치몬드에 입성한다.남부는 연방에 속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는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흑인들의 자유’를 위한 전쟁은 그렇게 수많은 사상자와 교훈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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