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씨의 입관식에 참석한 사람은 유가족을 빼고 모두 7명이었다. 조문객들이 일과시간과 겹쳐 있는 발인식이나 하관식보다 주로 하루 전 오후 늦게 갖게되는 입관식에 더 많이 참석하는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손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인원은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입관식도 다른 망자(亡者)의 그것에 비하여 대충 끝나버려 형식적인 면이 많았다. 젊은 목사가 집례하였는데 그 흔한 찬송가 한 구절 부르지 않고 몇 분 가량 설교를 하는가 싶더니 축도로 마쳐 버렸다. 줄잡아 10여분 정도 걸렸다. 짐작컨대 오씨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자녀 중 누구 하나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이런 큰 일을 당하자 부랴부랴 어디서 목사님을 모셔온 것 같았다.
다음은 늘 하는 대로 조문객들이 한 줄로 서서 망자를 참관한 후 도열한 가족들에게 문상하는 순서였다. 오씨 부인만이 애써 슬픔을 누르며 조문객을 맞았을 뿐 그 옆에 서있는 딸 내외와 어린 외손자들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아들과 며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씨의 죽음은 며칠 전 부인이 찾아와서 오래 못 갈 것 같다고 근황을 들려주었을 때만 해도 말이 그렇지 올해는 넘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내가 오씨를 근자에만난 것은 3월 하순께 세금보고 차 들렀을 때와 그 후 한달 뒤쯤 투자방법을 문의하려고 찾아왔을 때였다. 평소 건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혼자서 찾아오던 그였는데 이번에는 두 번 모두 부인과 동행이었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에는 보행조차 힘들어 부인의 부축을 받고있었다. 오씨는 지금처럼 이자소득이 형편없을 때 효과적인 재산증식 방법은 무엇이며 이에 부수되는 세금은 어떻게 줄일 수 있느냐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물어왔다. 나는 이런저런 방도를 들려주고 나서 맨 마지막에 덧 부쳤다. “오선생님. 제 생각인데요. 앞으로는 어떻게 재산을 늘리느냐 보다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네요.”
그가 깊이 패여 유달리 더 크게 보이는 눈망울을 남기고 돌아간 후 지난 두어 달 동안 그 부인은 수시로 우편물을 한 묶음씩 들고 찾아와 여태껏 남편 혼자 매사를 처리해 왔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니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는 불쑥불쑥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그녀가 좀 귀찮기는 했지만 오씨와 쌓아온 친분을 생각해서 잘 대해줬는데 부음을 전하기 직전에 와서는 “아들은 참 효자였는데 며느리가 생긴 후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병석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오는 것조차 뜸하고 그것마저 귀찮아서 저 멀리 오렌지카운티로 이사를 가버렸어요. 며칠 전 매우 위중하시길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오늘, 내일하시는데 그렇게 한번도 찾아오지 않으면 쓰겠느냐? 만약 찾아뵙지 못하고 돌아가신다면 넌 자식이 아니다. 장례식 때는 올 생각조차 말아라”고 말해줬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내가 오씨를 처음 만난 것은 6, 7년 전이었다. 그 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와 선물가게를 열었으니 세무업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자신은 은퇴 나이가 넘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별 직업 없이 빈둥대기만 하고 있으니 이런 사업이라도 차려줘서 스스로 살아갈 길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가게는 큰 이익은 없어도 그런 대로 한 가족이 먹고 살만큼은 벌이가 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처분하겠다고 알려왔다. 나는 뜻밖이라 그 이유를 물으니 오씨는 아무 대답을 안했지만 그 부인이 훗날 들려준 바에 의하면 “가게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아들이 밖으로 나돌기에 ‘얘야, 아버지가 사시면 앞으로 얼마나 사시겠느냐? 기다리고 있으면 전부 네 차지가 될텐데 조금만 참고 있거라’며 달래 왔는데 오씨의 건강이 그만 하니까 아들은 먼 동네로 이사를 가버렸고 그 후 회유할 때마다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을 모실 터이니 모든 걸 우리에게 맡기고 지내시라’고 하는데 이게 다 못된 며느리의 간계에 빠진 때문”이라며 몹시 분해하였다. 오씨에게는 그 아들말고 연방공무원으로 일하는 출가한 딸이 하나 더 있다. 나는 그 딸을 오씨보다 먼저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탓인지 친정에서 무슨 덕 볼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않고 있으나 아들과 딸을 너무 심하게 차별해서 그런 부모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평소 내왕아 없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오씨는 지난 10년 넘게 직업을 가지지 않았으나 경제적으로는 별 문제없이 살아왔다. 은행에 수십만불의 저축이 있고 임대수입이 제법 되는 상업용 부동산 세 개와 큰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었다.
입관식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며 내내 가슴속을 메우고 있는 답답증을 날려버리기 위하여 차창을 열어제쳤다. 불현듯 오씨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오씨는 생전에 그의 바른 성품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분명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해야 할 일에는 매우 충실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가족이나 친구들을 곁에서 떠나게 만들지 않았는지? 오씨 부인은 장례식 후에도 도와 달라며 계속 찾아오고 있다. 나는 그녀가 다음 번 찾아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준비해 놓고 있다. “이런 일로는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앞으로는 꼭 아들이나 딸과 상의토록 하세요”
조만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