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골프를 칠 때 처음 만나본 사람이다. 이 분은 내가 매 주말 함께 골프를 치는 보현 언니의 남편, K선생의 막역한 친구로 며칠 전에 한국서 K선생을 방문한 사람이다. 그들은 같은 의과대학 졸업하고 군의관 시절도 함께 보내며 멀리 떨어지기를 싫어했던 친구라고 했다. 후에 K선생이 미국으로 왔을 때도 한국에 혼자 있기 싫다고 미국까지 쫓아왔었다고 하니 그가 K선생을 얼마나 좋아하고 따랐는가는 짐작이 간다.
몇 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K선생이 한국에서 의술을 펴기 위해 돌아갈 것을 결심했을 때 그는 또다시 친구를 따라 귀향 보따리를 꾸렸다고 한다. 두 젊은 의사는 한국의 남단 전주에서 의료업을 시작했다. 도중에 K선생은 생각이 달라져 가족을 데리고 1970년 중반에 미국이민을 왔으나, 그의 친구는 위장내과를 성공적으로 개업하고 있었기에 그냥 눌러있을 수밖에 없었단다.
헤어져 있으면서도 해외전화를 이웃집 전화하듯이 해서 엄청난 전화요금을 물었을 정도로 서로 그리워했다. 그리움이 보지 않으면 못 견딜 만큼 커졌을 때 이렇듯 태평양을 날아와 만난 곤하는 친구 사이다.
평소 우리 부부가 존경하던 K선생 내외분이기도 했지만, 이렇듯 오랜 친구가 바다를 건너 찾아오는 깊은 우정을 지닌 분이라 생각하니 더욱 훌륭해 보였다. 처음 L씨를 만났을 때 이 분이 K선생의 가까운 친구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K선생보다 한 살 아래라고 하는데, 오히려 더 늙었다. 기골은 장대한 편이나 중병을 앓고 있는 듯한 피부색에 살집이라곤 하나도 없고 눈빛도 힘을 잃어 바라보기조차 힘겨웠다. 게다가 수전증까지 있었다.
고희를 넘긴 K선생은 연령이 믿기 어려울 만큼 젊었다. 탄력 있는 몸의 근육이나 전혀 처진 부분이 없는 몸매는 60대 초반으로 밖에 안 보인다. 골프도 바깥 온도가 9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도 꼭 걸어서 친다. 10년 정도의 연령차를 느끼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은 역시 골프뿐이 아닌가 해서 한 팀이 되어 정기적으로 골프를 치는데, 아름답게 나이 먹어 가는 그들의 모습에 늘 감동을 받는다. 70이 넘어서도 주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을 주에 4일 근무하는 의사라는 점과 은퇴는 생각도하지 않는 점등은 늘 우리 부부에게 귀감이 되는 부분이다.
취미도 얼마나 다양한지 그 댁을 방문하고 알았다. 벽에는 프로 화가의 솜씨 못지 않은 손수 그린 그림들이 붙어있다. 그 외에 2주에 한번씩 시 창작 교실에 나가 시작 훈련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분의 절친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L씨는 너무 공통점이 없었다.
L씨는 오랫동안 위장내과를 개업한 결과 재물도 많이 모았다고 한다. 아들도 의학공부를 시켜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았고 다른 자손들도 다 출가시켜 사는데 근심거리는 없는 편이다. 열심히 환자를 볼 때는 일이 싫어진 적도 있지만, 막상 자식에게 병원운영을 넘기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을 잃은 무용지물 같은 생각이 들면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가깝다는 아내도 자기의 아픔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그는 세상이 싫어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화창한 빛도 짜증스럽고 눈을 피곤케 할뿐이다. 밝은 빛을 차단시키기 위해 두껍게 커튼을 드리운 방에 들어앉아 외출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굶어 죽는다 해도 식구 중 아무도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을 거라는 소외감이 감쌌다..
의사인 L씨는 자기 몸을 진단하기 위해 의사를 찾았다. ‘혈압도 정상이고 콜레스트롤 수치도 낮고, 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불안증세로 나타나는 현상이 손 떨리는 증상인 만큼 맛있는 것 많이 잡숫고, 되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하세요. 멋있는 곳과 좋은 친구 찾아 여행이나 많이 다니십시오.’ 이렇게 권고했다.
“그래서 이 친구를 찾아왔지요. 아마 친구 만나러 이렇듯 이역만리 오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일 거요. 비행기 안에서 보니까 모두들 아들, 딸 보러가거나 형제들 보러 가는 사람이지 친구 찾아 나선 사람은 나 하나였어요.”
K선생이 따라주는 소주잔을 기분 좋게 들이키는 L씨는 얼굴에 잔주름을 많이 지으면서 화평한 웃음을 웃었다. “이래서 골프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이 나이에도 땀을 쏟으며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안 그래?”
“그럼, 잘 왔어. 푹 쉬고 놀다가 한국에 돌아가 새 힘을 얻어 뜻 있게 살아보게나. 내가 자네 힘없어 쓰러질 때 부축해줄 수 있는 영원한 친구가 되어줌세.” K선생의 이 말에 L씨는 정말 이 순간이 행복한 듯이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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