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로 첫 손에 꼽히는 사람이 칸트다. 철학에 아무리 무관심한 사람도 칸트라는 이름 두자는 들어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막상 “왜 칸트가 유명합니까” 하고 물으면 “글쎄요” 하며 머리를 긁는 것이 보통이다. 무엇이 80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동 프러시아의 소도시 쾨니히스베르크(구 소련의 칼리닌그라드)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이 노학자를 이름나게 했을까.
칸트가 이룩한 철학적 업적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해하는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에 의해 주관적으로 경험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낸 점이다. 어쩌면 평범하기조차 한 그의 이 주장은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릴 정도로 철학사상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제학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상품의 가치는 객관적이라는 것이 존 로크에서 애덤 스미스, 데이빗 리카르도로 이어지는 영국 고전 경제학의 입장이었다. 어떤 물건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그 물건을 만드는데 얼마나 공이 들었느냐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 마르크스다. 그의 노동 가치설과 계획 경제론은 모두 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제학에서 칸트와 비슷한 역할을 해 낸 사람은 칼 멩거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상품의 가치는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주방장이 아무리 열심히 땀 흘려 짜장면을 만들어 봐야 먹는 사람이 맛이 없다고 하면 그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장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며 21세기 경제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벨 경제학상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이 학파의 영향을 받은 시카고 대학이다.
상품의 가치가 주관적이냐 객관적이냐 하는 문제는 주가를 결정하는 것이 투자가들의 심리상태냐 통계수치냐 하는 논쟁과 직결돼 있다. 주가와 매일 발표되는 경제 자료와의 상관관계를 유심히 살펴보면 양자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날은 좋은 뉴스가 나왔는데도 주가가 떨어지고 어떤 날은 나쁜 뉴스가 터졌는데 오르는 일이 너무 잦기 때문이다.
지난 한달 반동안 전 세계 주가가 동반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미 다우 존스는 5년래, 나스닥은 6년래 최저치를 나날이 갱신하고 있으며 일본 니케이는 20년래 최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 등 동남아도 마찬가지며 유럽은 미국보다 더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독일의 나스닥에 해당하는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는 상장주식 가치가 95%나 날아가자 지난주 아예 폐쇄됐다.
그 동안 별다른 나쁜 소식이 나온 것도 아니다. 지난 며칠 사이 미국만 해도 실업률이 예상 밖으로 내렸다는 뉴스가 나와도 폭락, 부시가 항만 폐쇄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밝혀도 폭락, 하는 식으로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주식 시장이 외부 뉴스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욕망과 공포가 쓰는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2000년 3월 나스닥이 5,000을 치며 유포리아와 희망으로 부풀대로 부풀었던 증시에 공포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다. 일단 투자 분위기가 두려움에 휩싸이면 아무리 좋은 뉴스가 나와도 소용없다. 사람들은 투자 이익(return on capital)보다 투자금의 환수(return of the capital)를 더 걱정하기 때문이다. 공포는 욕망에 비해 2배가 강하다. 나스닥이 96년부터 4년간 벌었던 포인트를 지난 2년 사이 다 까먹은 것은 그래서다.
증시는 곰(bear market: 불황 장세)과 황소(bull market: 호황 장세)의 씨름판이다. 희희낙락으로 시작된 불황 장세는 패닉으로 끝나고 패닉과 함께 싹트는 호황 장세는 희희낙락과 함께 마감된다. 지난 한 달간의 폭락에도 불구, 증시는 패닉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아직도 떨어질 여지가 많다는 반증이다.
주가는 향후 경기를 재는 주요 지표다. 지금처럼 미 성인의 40% 이상이 주식 소유자일 때는 더더욱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세계 증시의 동반 폭락은 앞으로 다가올 경제적 폭풍의 전조다.
민 경 훈 <편집위원>kyu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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