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진미가 차려진 잔칫상이라도 지남철에 끌리듯 젓가락이 가는 밑반찬이 있다. 바로 김치이다. 어릴 적부터 혀에 인이 박힌 탓인지 간혹 김치가 빠진 밥상을 대하면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가 없다. 몇 끼 정도는 양식을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며 스스로 음식문화의 수준을 높이려 허세를 부려 보지만 이미 중독된 입맛은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미국 땅에 살다보니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양념으로 얹혀져서인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많이 먹는다. 그뿐 아니라 한동안 김치가 꿈에서조차 먹고 싶어 입맛을 다시게 한 적이 있었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미국생활이 채 익숙해지기 전에 임신을 했다. 둘러보아도 시댁식구들 뿐이라 입덧을 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남들처럼 폼나게 제철이 아닌 과일이나 비싼 음식이 아니라 대부분의 임산부는 냄새도 맡기 싫다는신 김치가 먹고 싶었다. 엄마가 담근 김치 한 사발만 있다면 울렁거리는 속이 금방 가라앉을 것 같았다. 김장독에서 갓 꺼낸 배추김치를 윗동 만 자르고 손가락으로 쭉쭉 찢어 따끈한 밥 위에 돌돌 말아 얹어 먹으면 꿀맛이리라. 강한 양념이 듬뿍 뭍은 총각무를 젓가락으로 찔러 들고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면 개운해질 것이다. 살얼음이 둥둥 뜨는 동치미에 떡 한 접시를 곁들인다면 입맛이 돌아올 것이고, 열무김치에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엄마가 김치를 담글 때 턱을 고이고 있다가 짭짜름한 배추속대를 집어먹거나 그 위에 매콤한 김치 소를 얹어 먹던 맛은 일품이었다.
김치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지방마다 그 맛이 다르고 집집마다 특유의 비법이 있다. 같은 재료로 동일한 사람이 담궈도 그때마다 맛이 다르다. 무심코 습관적으로 먹기에 진가를 깨닫지 못했는데 김치는 과학적인 음식이라고 한다. 적당한 소금의 농도로 절여진 배추와 고춧가루, 마늘과 파 등 각 재료가 갖는 독특한 성분이 한데 어우러져 발효와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음식이 바로 김치이기 때문이다.
정장 작용과 장내 세균을 정상화시켜 변비와 대장암을 예방한단다. 콜레스트롤을 청소하고, 혈압을 내려주며, 채소에서 나오는 비타민으로 주름살과 거칠어진 피부에도 도움을 준다. 젓갈류에서 나오는 칼슘 성분이 뼈를 강하게 해주기도 한다니 우리 조상님들의 삶에 대한 지혜가 느껴진다.
결혼해서 시어머님께 배운 음식 중에 김치 담그는 것이 제일 힘이 들었다. 배추 한 상자를 사면 보통 16포기가 들어 있는데 다듬고 절여서 씻는 단계를 거쳐 김치가 완성되려면 이틀을 소비해야 되었다. 그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려 달갑지 않았지만 먹거리의 기본이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유리병으로 8개 정도가 나오는데 시어머님은 다니러 온 시누이와 동서의 손에 하나씩 들려 보내셨다.
자식들에게 손맛이 깃든 음식을 먹이고 싶어하는 어머님이 이해가 되고, 나 또한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별 이견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지라 한 병씩 사라질 때마다 아까운 생각이 들곤 했다. 그냥 두고 먹으면 한동안 걱정이 없을 텐데, 다시 해야 될 것을 생각하면 귀찮고 꾀가 나서이다. 그래도 맛있게 먹겠다는 인사 한마디에 찜찜했던 마음 한 구석이 나박김치를 한 모금 마신 것 같이 개운해지고, 인심을 씀으로 인해 후한 점수를 얻을 수 있었기도 김치 한 병으로 몇 배의 효과를 얻고는 했었다.
만드는 동안에 덤으로 마음의 양식을 얻었다. 김치를 버무리고, 마늘껍질을 벗기면서 고부간의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날들에 대한 회상을 여자로서 느껴 보기도하고, 가족들의 숨겨진 비화도 들을 수가 있었다. 남편의 흉을 보기도하고, 평소에 껄끄럽거나 멋쩍었던 일도 은근 슬쩍 풀어놓는 좋은 기회다. 요즘은 분가를 해서 어머님과 음식을 만들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지를 못하고, 김치도 바쁘다는 핑계로 사다먹기에 우리 집의 맛이 아닌 대중화된 것이라 감칠맛이 없어 아쉽다.
마켓의 진열대에 가득 찬 김치를 보면 그 종류만큼이나 맛도 제각각이다. 한동안 일본의 ‘기무치’가 세계의 김치 시장을 휘어잡아 안타까웠는데 얼마 전 국제식품 규격 위원회 총회에서 우리의 김치가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우리의 것인데 새삼스레 인정을 받았다는 자체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이제라도 전통의 음식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현지인의 입맛에 맞을 ‘퓨전 김치’가 다각도로 개발되고 있단다. 매운 맛에 단맛을 곁들인 ‘크런치 오리엔탈’이나, 살사 소스를 개량한 ‘살사 김치’가 나온다니 기분이 색다르다.
김치는 우리의 전통음식이기에 그 안에 삶과 역사와 한이 들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나만해도 외국 생활에 부대끼는 표현 못할 스트레스와 미묘한 감정의 혼란함을 김치를 먹으며 푸는지도 모른다. 텁텁한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고, 답답한 속을 화끈하게 씻어 내려주는 그 맛깔스러움은 다른 음식과 비교 할 수가 없다. 시누이의 8살난 딸이 머리가 아프다며 김치 국물을 마시면 날 것 같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두 아들도 김치를 이용해 만든 찌개나 부침 등은 잘 먹고, 가끔 삼겹살을 삶아서 김치에 싸먹고 싶다고 할 정도이다. 역시 한국사람의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김치는 우리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영양가 있는 음식이다. 입안뿐 아니라 마음까지 안정 시켜 주고, 뿌리 의식까지 느끼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도 한다. 주위의 외국인들 중 김치의 맛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그들의 한국 음식에 대한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니 김치를 향한 사랑은 그칠 수가 없다. 오늘도 우리 집 밥상 위에는 배추김치와 깍두기가 올려 질 것이다. 김치는 물리거나 질리지 않는 우리의 ‘입맛 지킴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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