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였다. 가난한 시인의 유품에 무슨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마는, 생각대로 책만 가득한 아버지 방에선 건질 것이 없었다. 아버지 책상 서랍엔 오래된 필기도구와 스크랩북이 있었다. 필기도구는 동생들과 나누어 가졌고, 잡지에 기고한 글과 신문 사설을 스크랩해 놓은 것은 글을 쓴다는 이유로 동생들의 양해하에 내 차지가 되었다. 단 한 권 밖에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의 시집은 어머니가 보관하시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 네 남매를 결혼시키실 때마다 만들어 놓으신 방명록이 있었는데 내 결혼에 관한 것은 내가 가져왔다.
가져다만 놓고 안 풀어본 유품들을 지난 6월 1일 펴 보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 날 이었다. 아버지 생각을 하다가 아버지의 체취가 담긴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스크랩북에는 절기에 관한 글과 고전을 인용한 글이 많아서 앞으로 나의 글쓰기에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았다. 스크랩 북 보다 나의 관심을 더 끈 것은 대학노트에 꼼꼼하게 정리해 놓으신 결혼 방명록이었다. 친척들의 축하금과 하객의 축의금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있는 일종의 치부책이었다. 방명록의 첫 장엔 아버지가 쓰신 청첩장과, 예식 후에 하객들께 보낸 감사편지가 각 한 장씩 보관용으로 들어있었다. 둘 다 낯익은 아버지의 붓글씨 체 이다. 아버지는 주변의 문인 친구들과 신문사 선후배들의 결혼식의 사주단자와 청첩을 도맡아 써 주셨다. 한지에 쓴 아버지의 청첩은 서로 주문해서 받으려는 유명한 것이었다. 그러니 딸의 혼인에는 더 정성을 쓰셨으리라. 요즈음의 Thank You Card 에 해당하는 감사편지도 보내신 셈이니.
22년 전 아버지의 땡큐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지난번 소생의 딸아이 정아 출가 시에 베풀어주신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고마우신 뜻을 받들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일렀습니다. 짝을 이룬 OOO군에게도 따뜻한 가호가 있을 것을 믿으며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감사말씀 드립니다.’쉬운 편지 속에서 오래 전 나를 시집보내던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는 듯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청첩과 감사의 편지가 붙은 곳을 넘기니 노트의 첫 장이 되었는데 거기에는 친절하게도 ‘80년 5월 21일 금 시세 1돈쭝 45,000원’ 하고 기록이 되어있었다. 속물근성의 딸이 후에 흥미진진하게 볼 줄을 미리 아셨는지 아버지의 세심함이 놀라웠다. 김규동, 정벽봉, 이흥우, 김시철, 곽학송, 서기원 등 아버지의 친구들인 옛 시인들과 소설가들, 내 친구들, 직장동료들, 동네의 평화 수퍼 아저씨는 얼마를 부조했나, 단골 쌀집아줌마는 얼마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시엔 신경도 안 썼던 일이 지금 보니 흥미로웠다. 주욱 내려가다가 앙드레 김 10만원... 에서 놀랐다. 장부의 처음부터가 1만원 균일로 내려가다가 드문드문 5천 원 도 있는 속에 10만원은 큰돈이었고 앙드레 김 이라는 이름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외삼촌이 10만원, 큰아버지가 10만원을 했다고 적혀있으니 축하액수가 가까운 친척 수준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앙드레 김의 옷을 입어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경복궁 앞에 있던 그의 부티끄의 환상적인 진열장을 구경했던 적은 있어도 평생 그의 옷을 만져본 기억조차 없다. 말 수 적고 얌전한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아니예요 국장님, 호호호” 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 앙드레 김의 흉내를 내어 식구들을 놀래 킨 적이 있는데, 그때 약간의 교류가 있지 않았었나 싶다. 아버지도 앙드레 김의 중성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신문사에 다녔던 아버지와 언론매체를 통한 선전이 필요했던 디자이너와의 만남이 아니었을까?아버지가 안 계시니 궁금증을 풀 길은 없으나, 내 결혼 방명록에서 앙드레 김의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는 앙드레 김에게 공연히 친근감이 드는 것이다. 그 동안 앙드레 김에게 가졌던 쓸데없는 선입견과 반감이 무척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앙드레 김이 철수를 혀 꼬부라진 소리로 촬~스 라고 발음을 한다해도, 본명이 김봉남 이라 해도 웃지 않겠다. 그래야 나를 축하해준 하객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잠자리 날개 같은 그의 작품을 보고 ‘줘도 못 입을 옷‘ 이라고 말하지 않겠으며, 용궁에서 심청이가 입었을 법한 번쩍이는 자수가 놓인 옷도 동양풍의 우아한 옷이라고 고쳐 말하리라. 화장을 하고 다닌대도 호모니 징그럽느니 하지 말아야겠다. 그는 내 결혼을 10배로? 축하해 준 사람이므로.
앙드레 김이 중년의 체형을 커버해줄 옷을 디자인한다면 청문회에 불려나간대도 사고싶다.
아버지 생각을 하며 유품을 정리하면서 울다가 웃던 날이었다. 아버지가 이 얄팍한 딸을 보셨다면 뭐라 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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