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치가들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거짓말이 반복되면 일반대중이 참말로 알아듣는 한심한 세태를 내심 반기기조차 하는 것 같다. 풍문을 뉴스 매체들이 검증 없이 들은 대로 보도하다보면 거짓말에 무서운 힘이 실리고 끝내 마치 진리인 양 대접받게 된다.
먹기 살기 바쁜 서민들은 자기와 크게 이해관계가 없는 한‘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식으로 무관심하게 된다. 거짓말하는 사람일수록 목소리와 태도가 거세기 일쑤이기 때문에 진실이 거짓을 이길 재간이 없다. 선거철마다 유언비어가 판치는 이유는 거짓말과 유권자가 지닌 이 같은 속성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간의 성공사례들을 논할 때 김영삼 정권 말기에 터진 경제위기(소위 IMF 사태)를 해결한 공로를 첫 번째로 꼽는 것 같다. 김 대통령 스스로가 경제학에 통달한 사람으로 자부하고 있고 자신의 해박한 경제지식은 어지간한 전문 경제학자 수준을 넘는다고 혼자 느끼고 있는 듯한 인상이라 더욱 그러할 지 모른다.
1997년 말 당시의 한국경제 위기를 단순한 외환위기로만 규정한다면 김 대통령의 공로는 인정할 수도 있다. 2002년 6월말 현재 외환 보유고가 사상최대 액수인 1천1백억달러를 상회, 가까운 미래에 외환위기 재발 가능성을 크
게 배제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5년 전 한국경제 위기의 본질
은 외환 고갈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과중한 기업채무였다
고 봐야 옳다. 외환위기는 부수적이고 피상적인 요인이었던 점을 간과하고 이를 주원인으로 착각하며 경제위기의 본질이 치유되었다는 성급한 결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따라서 한국경제 위기 요인의 근본적 해소여부는 기업
부채가 1997년 이후 얼마나 줄었으며 현재 부채수준은 기업이 감당할 수 있
는 정도인지를 따져본 후에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이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자금순환계정 기준 기업부채 추이 데이터에 따르면 2001년도 기업부채 총액은 1,092조원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했던 97년의 932
조원에 비해 16.5%가 증가했다. 지난 97년도 부채규모가 적정 수준이었다
면 이 정도 증가는 그 동안의 경제성장을 감안한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
다. 기업부채는 자본주의 신용경제에서 당연히 발생하게 돼있으며 경제운용
을 원활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금융요소이다. 그러나 부채비율이 기
업 정상수익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다면 이는 기업 파탄은
물론 국가경제까지도 불황이 닥치면 마비시킨다. 기업부채 총액은 절대 액
도 중요하지만 국내 경제활동 지표인 국내 총생산과 대비한 상대적인 비율
이 더욱 중요하다.
1997년 경제위기 당시 부채 대 국내 총생산 비율은 위험수준을 넘는 220%이
었고 2001년에는 222%로 4년 전 보다 줄기는커녕 다소 늘어난 것이 현실이
다. 더구나 부실기업 부채경감을 위해 쓰여진 공적자금 지원액 156조원을
합친다면 이 비율은 253%나 돼 한국경제 위기의 근본 요인이 개선은커녕 경
제위기 돌발이후 오히려 크게 악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IMF사태 이후 파산한 수많은 대소기업들의 부채가 기업의 도산과 동
시에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없어진 점과 현재 한국 기업 전체 부채액수가 전
혀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을 종합해 보면 살아 남아서 현재 영업활동을 하
고 있는 기업들의 부채부담은 그 동안 더욱 크게 불어났을 것이라는 사실
도 쉽게 짐작 할 수 있게 된다.
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외상도 중요하지만 내상이 더 심각한 경우가 얼
마든지 있다. 외환문제 해소가 외상을 치료한 것이라면 기업부채 문제는
더 위험한 내상인데, 이에 대한 치료를 등한시한 결과 증세가 악화 일로를
치닫고 있다면 그 환자가 치료되었다고 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미국의 기
업부채는 국내 총생산고의 40%에 불과하다.
일부 기업들은 자산의 대대적인 매각을 통한 부채절감에 총력을 기울인 결
과 실제로 부채수준을 성공적으로 적정수준 이하까지 내린 사례가 적지 않
다. 그리고 경제위기를 겪으며 터득한 교훈으로 경영 정상화 작업을 과감하
게 단행한 후 체질이 크게 개선된 기업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
분 기업들의 부채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간과해
서는 안 된다.
한국기업들의 근본적인 약점인 높은 부채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에 경제위기
를 벗어났다는 성급한 주장은 눈에 안 보이는 속병은 병이 아니라는 위태로
운 무지와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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