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사회계급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다. 공산주의 사회는 ‘공산당원’과 ‘비당원’이다. 그런데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사회계급이 다섯개로 나뉘어져 있다. 일종의 출신성분인데 그곳에서는 ‘토대’라고 부른다. 군에 입대하거나 김일성 대학 입학을 지원하거나, 아파트를 신청하거나 국가 주요기관에서 일하기를 원할 때 제일 먼저 따지는 것이 이 ‘토대’다. 심지어 결혼할 때도 “그 집에 토대가 좋은가”를 부모들이 묻는다.
가장 알아주는 토대는 항일투사 집안이다. 후손들은 쌀 배급에서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는다. 두번째가 빨치산 출신과 공화국 건국 혁명요원들이다. 세번째가 노동자, 네번째가 친일파와 지주 집안이고 다섯번째가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치안대’ 집안이다. 미군과 국군이 북한에 진주했을 때 치안대 완장을 차고 ‘빨갱이’를 색출하러 다닌 사람 집안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자면 국군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이다.
북한에서 이 ‘토대’가 얼마나 무게를 가지는가는 만경대 학원 입학심사에서 알 수 있다. 만경대 학원은 북한 최고의 학교로 엘리트 양성소나 다름없다. 이 학원에 우선적으로 입학허가 되는 ‘토대’가 항일투사 집안과 빨치산 집안의 후손들이다.
항일투사를 이렇게 높게 받드는 북한에 일본수상이 찾아갔으니 의전절차가 어떤 모양새를 갖추었을까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마중 나가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연도에 환영인파도 없다. 공산국가에서 최고의 제스처로 간주되는 끌어안기도 없고 환영 꽃다발도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놀라운 것은 고이즈미 일본수상의 평양 방문을 북한의 로동신문이 1면 밑쪽에 불과 3단 기사로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방송에서는 아홉번째 뉴스로 보도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역사적인 북한·일본 정상회담을 그 정도로 취급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북한이 일본에 대해 고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인민들에게 보여 주려는 기색이 뚜렷하다. 김정일이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고이즈미가 평양을 찾아오도록 한 것 자체가 인민들에게 주체사상을 보여주려는 계획된 장면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태양으로 상징되고 위대한 수령이기 때문에 외국 원수가 평양에 찾아와서 인사드린다는 식의 외교를 펼쳐야 주체사상과 하모니가 된다.
평양의 큰 호텔에 가보면 복도에 김정일 위원장의 동정을 알리는 화보판이 전시되어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화보판 편집을 묘하게 해놓아 김대중 대통령이 마치 김 위원장에게 인사드리러 온 것처럼 꾸며져 있고 남한 기자들이 김정일을 둘러싸고 파안대소하는 사진은 김정일의 아량과 리더십을 돋보이게 하는 성격이 짙어 북한에서 사진 찍힐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반면 일본측의 자세도 만만치가 않다. 고이즈미는 미소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는 참모들의 충고가 있었던 것 같다. 웃으면 매스컴으로부터 “일본 국민을 납치한 자들의 나라를 찾아가 실없이 웃기만 하는 수상”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다.
김정일이 고이즈미가 머물고 있는 백화원 초대소에 찾아 왔다는 것도 일본측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고 무엇보다 김정일 자신이 북한공작대의 일본인 납치사건을 인정하고 공식사과 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게다가 괴선박 일본 앞바다 출몰사건까지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했을 정도다. 김정일 외교의 대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굶은 배를 움켜쥐고도 큰소리 펑펑 쳐가며 고자세를 취하는 북한식 외교는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목에 힘을 주는 이들의 외교 스타일은 한국 정부도 배울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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