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도 타고난 팔자가 있나봐요. 여자한테 늘 쥐여사는 팔자가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없으면서 큰소리 떵떵 치는 팔자가 있어요”
얼마전 한 모임에서 ‘남자의 팔자’가 화제에 올랐다. 그날 화제의 주인공은 한인사회에서 꽤 알려진 어느 사업가였는데, 돈많고 능력있기로 유명한 그가 집에만 가면 아내에게 꼼짝을 못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었다.
하루종일 회사업무로 바쁘게 움직이다 퇴근을 하면 전업주부인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하고, 골프약속 하나를 해도 아내의 재가를 거쳐야 하며, 친지들 모임에서 재미있게 어울리다가도 아내가 “집에 갈 시간이다”고 눈짓하면 그 즉시 일어서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라고 그 부부의 친지는 말했다.
“조건으로 보면 여자들이 업고 다녀도 부족할 남편감인데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기를 못 펴고 살까. 그게 그 남자의 팔자인가 보다”고 그날 모인 40·50대 여성들은 반농담삼아 결론을 내렸다.
며칠전 한국에서는 그보다 더 팔자가 사나운 한 남성의 이혼소송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역시 아내에게 함부로 취급당할 만큼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명문대학을 나와 대기업 이사직을 지냈고 강남의 고급 아파트를 포함, 집도 두채나 소유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끊임없이 그를 ‘무능하다’며 구박해 남편이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담당 판사는 그 여성이 “남편을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돈을 버는 사람으로서만 인식하고 남편에게 모욕스런 언행을 해 두사람의 혼인관계는 사실상 파탄났다”며 이혼을 승인했다.
보도가 너무 남성쪽 시각에 맞춰졌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 여성이 남편에게 밥도 빨래도 안해주며 ‘집을 나가라’고 횡포를 부린 것이 사실은 부족한 ‘돈’이 아니라 결핍된 ‘애정’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점을 감안해도 여성들, 특히 한국 여성들은 남편의 경제적 책임과 수고를 지나치게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 남편의 돈 벌어올 책임에 대해서 너무 당당한 여성들이 있는데, 가끔 남성의 편에 설 기회가 있을 때면 그 부당함이 보인다.
요즘 직장의 한 동료는 친정 동생 때문에 속이 상해 있다.
“수출업을 하는 동생이 경기가 안좋아서 고전 중이에요. 그런데도 올케는 아이들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더군요. 동생은 밤잠을 못자며 사업을 살리려 애쓰는데 그 처는 돈 쓸 궁리만 해요”
월급쟁이 남자 후배들에게서도 가끔 풀 죽은 소리를 듣는다.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 가정의 생활비가 부족하면 부부 공동의 책임이지 왜 남편에게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일까. 전통적 가부장제에 균열이 오고, 남녀평등이 새로운 원칙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이중성 때문이라고 본다.
여성들이 권리에 있어서는 새 원칙에 맞게 남편과 동등한 대우를 바라면서, 책임에 있어서는 과거 가부장제에 안주, 남편에게 우선적 책임을 돌리는 것이 1세들의 보편적 정서이다. 여기에 가장으로 무게잡고 싶은 남편들의 체면이 합쳐지면서 ‘돈 버는 건 남편 책임’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래서 1세 여성들 대부분이 직장일을 하는 미주한인사회의 현실에도 불구, 직업인으로서 진지한 목표를 가진 여성은 많지가 않다. “생활비를 보태느라 일을 하지만 남편이 돈 잘 벌면 언제든 그만둘 태세”인 여직원들이 많다고 한 은행장도 지적했다.
“주부 직원들은 대개 직업의식이 떨어집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기 계발을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을 완수하는 치열함이 부족합니다”
남편을 ‘보험’으로 여기는 의식구조인데 그런 안일한 태도가 개인사로 끝나지 않고 여성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가 있다. 여성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남편이 돈 버는 기계일수는 없다. 책임도 권리도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 진정한 남녀평등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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