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지넬 구스만 맥밀런
9 월11일 오전 10시28분,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이 자살폭탄 테러로 붕괴되던 바로 그 순간 북측 빌딩 64층에서 근무했던 지넬 구스만 맥밀런(31)은 비상계단을 정신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테러 당일도 그 어느 아침과 똑같이 출근을 했고 컴퓨터 앞에 앉아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지넬은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메리칸 항공기가 빌딩 94~98층에 부딪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실 공포보다는 호기심이 느껴져 창문 밖을 내다보니 빌딩 밖으로 종이 더미가 폭설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으로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렸던 지넬의 귓가에 ‘비행기가 빌딩에 충돌했다. 지금 당장 건물 밖으로 도피해야 한다’는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공포와 의아심을 느끼며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빌딩은 무너졌다.
그 후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치솟던 화염과 연기, 그리고 암흑뿐.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쪽 다리가 잔해더미에 눌려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몸이 떨리고 오른쪽 다리에는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얼마나 주위를 더듬었을까 순간 손가락을 스치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반사적으로 사람일거란 추측과 동시에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나 했던 그녀의 바람과 달리 손가락을 부드럽게 해줬던 그것은 죽은 소방관의 다리였다. 시체라도 상관없었다. 무언가 몸을 기댈 것이 절실했던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잔해더미를 헤치고 나와 시체에 몸을 기댔다. 뻣뻣해졌던 몸이 녹아드는 느낌과 동시에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 26시간이 지난 9월12일 오후 12시30분께 지넬은 참사현장에서 최후의 생존자로 구조됐다.
그로부터 1년. 그녀의 삶은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테러가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삶의 변화들이 ‘최후의 생존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찾아왔다.
4차례 수술을 하고도 오른쪽 다리 양쪽에 2피트 길이의 상처를 훈장처럼 갖게 된 지넬에게 테러 전 자꾸만 결혼을 미루는 바람에 심한 말다툼을 했던 남자친구 로저 맥밀런이 병상에서 프로포즈를 했고 그들은 두 달 후 시청에서 결혼했다. 게다가 지난 7월에는 여성잡지 ‘브라이드’의 주선으로 CBS-TV로 중계되는 가운데 꿈같은 결혼식을 올렸고 2000년 취업비자가 만료된 후 줄곧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불법체류의 신분 문제도 테러 희생자라는 사실 하나로 이민국(INS)의 관대한 처분 덕에 말끔히 해결됐다.
그런데도 정작 그 자신은 예전 같지 않다. 테러 당시 근무했던 항만청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도 잔인한 기억이 지넬을 괴롭힌다.
건물이 붕괴되던 순간 서로를 걱정하며 빨리 대피하라고 소리쳐 주던 직장 상사도, 비상계단을 내려오면서 손을 잡아주던 친구 로사도, 테러가 발생했던 그 아침 코코아를 함께 마시며 수다를 떨었던 수잔도 죽고 없는 회사에서 일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소셜 워커가 돼 다른 사람들에게 직업을 찾아주는 일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적십자사의 보조금과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재정지원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던 그녀였지만 이젠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남편이 출근한 뒤 텅 빈 아파트에 남아 성경을 읽고 텔리비전을 시청하며 하루를 보낸다. 친척과 친구들은 열정과 활기에 넘치던 그녀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은선 기자> eunseonha@koreatimes.com
아빠 잃은 힐러리 스트라우치
세의 힐러리 스트라우치는 테러 참사의 이중 피해자다. 아빠를 잃은 슬픔에 빠질 겨를도 없이, 엄마를 위로하며 함께 부둥켜안고 울 여유도 없이, 용감한 ‘9.11 키드’라는 꼬리표를 단 유명인이 되어 아빠와 함께 그녀 자신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요즘 가장 즐겨보는 채널은 푸드 네트웍. 메뉴에는 관심도 없지만 아빠의 죽음에 대한 악몽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TV 채널이기 때문이다. 뉴스는 말할 것도 없이 MTV에서도, 심지어는 애니멀 채널에서까지도 구조견이 등장하면서 9.11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힐러리를 괴롭힌다. 어린 힐러리에게 TV는 사랑하는 아빠가 눈앞에서 한순간에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고 또 보게끔 하는 고문기구였다.
2001년 9월11일 아침, 힐러리의 아빠 조지 스트라우치는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우스 타워 99층에 있는 직장 ‘에이온’(Aon) 보험사에서 엄마 지니에게 “지금 대피중이니 안심하라”며 두 번이나 전화를 했었다.
처음엔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두 번째는 울음 삼킨 목 메인 음성으로.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후 힐러리는 반친구들과 함께 아빠의 거대한 사무실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학급 TV를 통해 목격했다. 그 순간부터 미디어의 스팟라잇을 받기 시작한 힐러리는 슬픔을 실감하기도 전에 세상의 무대에 올려져 졸지에 ‘9.11 키드’로 괴로운 유명세를 타게 됐다. 학교에서는 신물나도록 과잉친절을 베풀거나 아예 슬슬 피하는 친구들 투성이었고 선생님마저도 “넌 나의 히어로야”라며 부자연스럽게 대하기 시작했다.
공적인 시간과 장소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생활에서마저도 힐러리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위로가 필요한 엄마를 위해 ‘엄마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것. 사별위로 캠프(bereavement camp)에서까지도 힐러리의 배역은 정해져 있었다.
“클래스에서 자신의 슬픔을 가장 설득력 있게 표현한 최우수 학생입니다.” 캠프 디렉터 린 휴즈의 평가에 따라 모든 카운슬러들이 힐러리를 자신의 치유 그룹으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했다. 힐러리는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엄마 지니가 17세 때 만난 아빠 조지와 뉴저지의 작고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에서 10년 연애 끝에 결혼, 또 다른 10년만에 가까스로 얻은 늦둥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은퇴후 부모를 모실 계획까지 세우고 있을 정도로 야무진 꼬마였다.
주대표급 수영선수이자 리더십, 학업, 글재주 등 팔방미인이었던 힐러리는 가족 중 누가 세상을 떠나기는커녕 심각하게 아파 본 적도 없었던 ‘맑고 쾌청한’ 인생을 살아 왔다.
9.11 이후 힐러리는 밤마다 불타는 집안에 세 식구가 모두 갇혀 버둥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학교서는 시험마다 완벽한 성적을 거두는등 독한 모습을 보여 주변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여기 저기서 같은 처지에 있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 아주 조금씩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 힐러리는 명절마다, 가족모임마다, 여전히 아빠 앞으로 날아드는 고지서들을 받아들 때마다, 그리고 아빠와 함께 했던 매 순간이 기억날 때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수없이 할퀴고 지나간 지난 한 해를 과거 속으로 떠나 보내려 애쓰고 있다.
이제 아빠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 가을. 여러 미디어들이 앞다투어 9.11 특집 인터뷰를 해갔지만 아무 것도 보지 않기로 또 다시 굳게 마음먹으면서.
<김상경 기자>sangk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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