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한국의 산하는 폐허가 됐다. 200여명의 인명이 희생된 참사다. 지난 70년대 조국에서 살았던 교민들이라면 사라호 태풍의 처참한 피해를 기억할 것이다. 이번 루사호 태풍의 피해는 그보다 최고 10배에 이른다니 조국의 산하가 어찌됐으리란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급작스런 자연재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당국의 변명은 정말 곤장 감이다.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문제의 태풍이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한반도를 강타할 때까지는 닷새가 걸렸다. 태풍의 길목인 일본은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방송이 거국적으로 나서 주민 홍보와 대처요령을 연일 알리며 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정부 관리들은 태풍이 상륙하기 전부터 안전모와 작업복 차림으로 도내 곳곳을 돌며 대비했다. 방송들은 이런 현장을 거의 생중계 하듯 일일이 보도했다. 오키나와와 후쿠오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갈 때는 태풍의 위력이 절정에 달할 때였지만 그 피해는 경미했다.
한데 우리는 어떠했던가. 기상청과 TV방송들은 태풍의 진로가 아직은 불확실해 한반도 상륙 여부는 좀 더 지켜 봐야할 것이라고 알렸다. 일본열도에 부딪혀 소멸되거나 대만 쪽으로 빠져나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도대체 긴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한가한 기상예보만 내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태풍은 북쪽으로 진로를 틀어 한반도를 강타했다. 대비하는 자세가 그 모양이었으니 어느 장관, 어느 도지사 한 사람 안전모를 쓰고 위험현장에 나가 주민들을 만나고 수해대비를 독려했겠는가. 그저 팔짱만 끼고 TV 기상 뉴스나 듣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재산과 가족을 잃은 수재민들이 “자연재해에 인재까지 더했다”며 분노를 토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IMF를 극복하고 세계경제 10위권 안에 들었다고 큰소리 땅땅 치고 경기 침체에 빠진 일본을 오히려 우습게 보기 시작한 우리의 대비는 그토록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약 5조원이라는 천문학적 피해를 낸 이번 태풍 때 인재를 몰아온 정부 책임자들은 누구인가?
첫 번째 책임을 질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국가 재난의 정치적 행정적 책임이 최고 집권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천재지변을 대통령인들 어찌 막느냐고 청와대측은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이번 태풍 피해의 전후를 살펴보건대 재해재난을 대비하는 당국의 자세가 느슨하고 행정력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집권자에 돌아 갈 수밖에 없다.
김 대통령은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업무량을 많이 줄인 것으로 보도됐다. 비서진들은 한 때 몸살로 업무를 보지 못할 지경까지 간 8순의 노 대통령에게 골치 아픈 일은 가급적 보고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진로도 불분명한 태풍문제를 심각한 안건으로 보고하고 대통령 주재 아래 대책회의를 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총리자리도 비어 있는 판이라 태풍문제는 기상청과 재해대책본부의 ‘통상적인 업무’ 정도로 치부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고 미국 같은 나라처럼 시스템이 움직이는 나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가장 ‘인치’(人治)가 심한 나라가 한국이다. 대통령이 “태풍에 대비하라”고 장관들을 닦달하고 현장을 시찰하며 극성을 떨어야 일이 돌아간다. 어찌 태풍뿐인가. 지금 이 나라는 국정 전반에 유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노 대통령이 몸을 쉬고 있는 동안 국정은 헛돌고 권력 쟁취를 위한 정쟁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김 대통령이 그 많은 수해지역 중 강릉지역 한 곳만 시찰하고 돌아온 것도 구설수에 올랐다. 동분서주 피해지역을 모두 찾아 나선 역대 다른 대통령들과는 다른 모습인 때문이다. 그래선지 그에겐 “일하는 집권자”의 이미지가 태부족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중앙 정치무대가 그렇더라도 현장 행정을 책임 맡은 지방관서라도 제대로 했다면 피해는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지사니 시장이니 군수니 하는 사람들 태반이 지방행정의 노하우도 철학도 없다. 수익사업을 한답시고 골프장을 무더기로 허가해 산림을 훼손하고 경관 좋은 하천 주변마다 러브호텔을 짓게 해 자연과 풍속을 함께 해치게 한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이번 태풍피해의 두 번째 책임자들이다.
정부관리들이 곤장 맞을 짓을 했지만 우리 국민들은 책임이 없는가도 곰곰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웃 일본이 각종 재해로부터 비교적 무사한 것은 당국의 철저한 정책적 대비에다 주민들의 규정 준수와 자위태세가 함께 작동했기 때문이다. 냇가에는 집을 짓지 않고 수로를 제때 정비하고 비상식량과 대피계획을 세워 만일의 사태에 늘 대비하는 준법정신이 몸에 밴 일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정말 중구난방이요 무대책 무방비에 몸이 풀어진 국민이다. 불행한 일이 터지면 자신의 책임을 생각하기에 앞서 정부와 남의 탓만 하기 바쁘다. 공사판마다 판치는 탈법-불법-편법의 악습 뒤에는 우리 국민의 법 준수 불감증이 도사리고 있다.
이대로 라면 우리의 장래는 암담하다. 차라리 OECD(국제 경제협력기구) 회원 간판을 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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