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큼 많은 사람들이 파산한 해는 미국 역사상 없었다. 최대 소매 체인인 K 마트의 파산을 비롯 당시까지 사상 최대 규모였던 엔론, 이를 갱신한 월드컴, 이밖에도 US 에어웨이, 글로벌 크로싱 등 굴직 굴직한 회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만세를 부른 것은 대기업뿐만이 아니다. 지난 6월말로 끝난 2001~2002 회계 연도 중 파산한 개인과 기업은 150만 건으로 사상 최대다. 이 역시 당시까지 사상 최대였던 전년도 기록을 깬 것이다. 불과 20년 전 28만 건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증가다.
왜 이처럼 파산은 나날이 느는 것일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기 침체다. LA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목인 빅터빌을 지나다보면 한번도 손님을 태워보지도 않은 새 비행기가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사마의 비행기 테러로 여행객들의 심리가 위축된 데다 까다로운 공항 검색, 경기 침체로 손님이 대폭 줄어들면서 주문한 비행기를 띄워 보지도 못하고 방치해 놓은 것이다.
이미 주요 항공사 하나가 파산했고 머지 않아 3대 항공사의 하나인 유타이티드가 뒤를 이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항공 산업의 위축은 호텔, 식당, 관광업계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통신업계의 과 투자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 90년대 붐을 주도했던 닷컴과 인터넷 버블은 통신 버블에 비하면 ‘새 발에 피’라는 것이다. 아무도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수천 억 달러가 통신 장비 과투자에 낭비됐으며 다른 분야 경기가 회복돼도 통신만큼은 수년 내 호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중증을 앓고 있는 것이 미 경제의 1/7을 좌우한다는 자동차 업계다. GM, 포드, 다임러 크라이슬러 등 3대 회사는 0% 이자율로 손님을 끌어 들여 판매를 늘리는 데는 성공했지만(실질적으로 평균 2,000달러 할인 효과가 있다) 실제로 남는 것은 별로 없는 장사를 하고 있다.
3대 회사 중 가장 단가가 낮은 GM은 소폭의 이익을 남기고 있으나 크라이슬러는 차 한 대 팔아봐야 본전, 포드는 적자다. 노조와의 계약이 끝나는 2003년이 되면 무더기 해고가 불가피할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자동차 업계 일자리 하나가 사라지면 유관 업종 근로자 4명이 실직한다. 차 관련 업종의 연쇄 도산이 우려되고 있다.
파산 급증의 또 하나 이유는 연방 상 하원이 통과시킨 새 파산법이다. 현재 부시 대통령의 서명을 남겨 두고 있는 이 법은 개인이 파산을 선언함으로써 크레딧 카드 부채를 털어내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 법이 시행되기 전 서둘러 파산을 신청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파산 증가에 일조하고 있다.
1968년까지 만도 미국인의 크레딧 카드 부채는 14억 달러로 자동차 론의 1/20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그 후 폭발적으로 불어나 이제는 자동차 론보다 25%나 많아졌다. 1995년에서 2000년 사이 미국인의 소비자 부채는 7조 5,000억 달러로 50%나 늘어났다. 연 소득 증가율이 4~5% 정도임을 감안하면 대다수 미국인이 수입보다 많은 부채에 허덕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파산에 대한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있다. 70년대 이전까지 미국인들도 파산 신청하는 것을 꺼렸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선을 지나 부채를 손쉽게 터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관대한 파산법을 악용, 크레딧 카드 부채를 잔뜩 쌓아 놓 고 파산을 통해 합법적으로 떼어먹는 케이스까지 등장한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파산을 하기 쉬운 나라의 하나다. 한국이나 일본에서처럼 빚을 갚지 못하면 감옥에 가고 한번 파산을 하면 평생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분별하게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한번 실패한 사람이 재기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한 때 실리콘 밸리 벤처업계에서는 ‘한번 파산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하이텍 분야에 도전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파산법의 악용을 막자는 새 법의 취지는 좋다. 그러나 소비 심리가 위축돼 있는 현 시점에서 이를 시행할 경우 경기를 더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부시는 이 법안에 서명하기 전 지금이 과연 최선의 시점인지 신중히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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