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면 난해할 것 같아 괜히 주눅드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입가에 절로 웃음을 띄게 하는 편안한 시들도 있다. 다음의 시가 좋은 예이다.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 공동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오탁번 ‘장모님’중>
중년 이상의 연령층이라면 금방 짐작했겠지만 시의 ‘장모님’은 바로 나이든 ‘아내’이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옛날 ‘외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남동생’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남편’의 얼굴에서 결혼할 즈음 ‘시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은 나이 먹으면서 겪는 빼놓을 수 없는 경험 중의 하나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동의어이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4나 5, 혹은 6 … 이어서 괜히 허무하고 쓸쓸할 때가 있지만, 뒤집어 보면 운 좋게도 오래 살아 그런 나이를 경험해본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나이가 마음에 안들게 많다 해도 “이런 나이라면 차라리 안 먹는게 더 낫겠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나이를 먹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숙제 - 나이먹기를 다룬 책이 최근 눈길을 끌었다. 롱 아일랜드대학 교수이자 작가인 로저 로젠블라트가 쓴 ‘나이 듦의 법칙’(Rules for Aging)이다.
“인생에서 가능한 한 실수를 줄이고 성공적으로 나이 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저자가 밝힌 이 책은 한국에서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58’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미국사람 특유의 익살과 재치로 재미있게 쓴 책일텐데, 번역을 거치고, 문화적 정서적 거리가 가로막아 한국어 번역판은 재미가 많이 깍여나간 상태이다.
나이를 유쾌하게 먹기 위해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쓸데없이 속을 끓이지 말라는 것이다. 수명을 몇십년은 연장시킬수 있는 법칙이라며 그가 내놓은 충고는 이런 조항들이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제1조) ‘당신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제2조) - 지나보면 별 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끙끙 앓으며 보낸 시간, 남들은 각자 자기 일로 바쁜데 혼자서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느라 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제3조 ‘나쁜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라’도 같은 맥락이다. 뭔가 오해받을 일이 생겼을 때 그걸 해명하려고 애쓰다 보면 긁어 부스럼만 만들게 된다. 가만 내버려두면 문제는 저절로 가라앉고 불필요한 마음 고생으로 늙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도 하나의 과학적 현상인 만큼 잘 늙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의 58개 충고중 ‘기술’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속도를 늦추지 말라’‘묵묵하게 그리고 꾸준히 - 이것이 경주에서 이기는 비결이다’등.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다.
마라톤을 할 때 제일 큰 고비가 중간지점을 통과할 때라고 한다. 그때쯤 되면 너무 힘이 들어서 ‘잘 달리고 싶다’는 의욕은 사라지고 쉬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해진다. 이때 힘들어도 계속 달리면 완주가 가능하지만 ‘조금 쉬자’고 긴장을 풀면 도저히 다시 뛸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지친 상태에서도 관성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던 팔다리가 일단 속도를 늦추고 나면 스르르 맥이 풀리면서 더 이상 움직일수가 없게 된다.
나이 먹기의 기나긴 마라톤도 삶에 대한 팽팽한 긴장을 풀면 내리막길이다. 지난 5월 어버이날을 맞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는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씨와 배삼룡씨의 특별쇼가 있었다. 일흔일곱 동갑인 그들이 사흘씩 계속된 공연을 할 힘이 어디서 나느냐고 한 기자가 묻자 그들은 이런 대답을 했다.
“우리의 나이는 호적에만 있을 뿐 마음속에는 없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라고 뇌까리는 순간 늙어버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숫자를 의식하지 않는 묵묵한 전진 - 그것이 나이를 잘 먹는 비결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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